[글로벌 포커스]'패잔병' 이 갈 때와 올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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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요즘 일본의 나리타 (成田) 공항 서울행 탑승구는 음산하기 짝이 없다.

비행기 이륙을 기다리는 한국인들의 표정이 어둡고 침통하다.

맥없이 죽 늘어서 있는 상사원들과 금융기관 관계자들,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가는 유학생들, 간판을 내린 유흥가의 직장에서 밀려난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처량하다.

한국의 금융위기로 일본에서 철수하는 기업인들 사이에선 마치 누군가를 두들겨 패주기라도 할 듯 볼멘소리도 들린다.

어떤 이는 자신을 패잔병으로 비유한다.

일본인들의 표정도 밝지 못하다.

'위기' 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남용될 정도로 장래에 대해 비관적이다.

그러나 위기의 차이는 엄청나다.

한국이 급성에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는 빈털터리라면 일본은 만성병에 시달리는 부자다.

일본에서는 정부가 이끌어 온 경제성장의 신화가 사라졌고 부동산만 사놓으면 치부한다는 기업의 토지 신화도 없어졌다.

가계부문에서는 종신고용이나 연공서열 신화도 무너졌다.

일본이 앓고 있는 만성병은 첫번째로 정치파탄을 가져왔다.

경제.사회분야의 구조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개혁을 부르짖어 온 야당은 사분오열됐으며 여당은 리더십을 잃었다.

관료주의의 파탄이 두번째다.

기득권에 매달려 온 관료집단은 메이지 (明治) 시대 이래의 녹슨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다.

청빈사상이 사라지고 부정이 빈발하고 있다.

세번째는 기업사회의 파탄이다.

주주들이 넘겨준 이른바 백지위임장에 안주하고 여전히 일본적인 고용관행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기업을 둘러싼 뒷거래가 여전하다.

신용이 떨어진 일본의 은행 및 증권사들이 잇따라 도산했다.

그러나 세계 제2의 경제대국 일본의 엔화 시세가 한국처럼 폭락할 것으로 우려하는 전문가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비록 금융 시스템이 불안하다 하더라도 제조업이 탄탄하고 높은 기술수준이 일본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일본의 엄청난 달러 재산은 미국 시장을 뒤흔들 위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외국자본.외국기술.외국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고 그 위에 지도자가 경제외교 음치였다는 게 더욱 탈이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또 인치 (人治) 국가를 고쳐 나가는 데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일본에선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 지도자를 괴롭혀 왔다.

간사이 (關西) 대지진이 일어났는가 하면 금융기관의 불량채권액이 천문학적인 숫자 (78조엔 = 1천14조원) 를 기록했고 국가 및 지방정부 채무액은 국내총생산 규모를 넘어섰다.

실업자수도 계속 불어나고 있다.

일본 국민들도 이젠 정부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21세기를 대비한 개혁이 너무 더디다는 것이다.

국민의 정당 지지도는 내리막길이다.

지식층도 자국 은행에 묻어 두었던 예금을 미국계 은행으로 옮기는 판이다.

일본 국민의 사기도 한국만큼이나 뚝 떨어져 있고 장래에 대한 불안도 엄청나다.

우리가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를 훌륭한 경제교사로 삼는다면 한국의 경제.사회 기본틀이 경쟁력 있는 시스템을 갖춰 한국의 발전 모델이 일본에 참고가 될 것이다.

한국인의 도전적인 자세는 불확실성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일본은 개혁의 진척이 더디며 아이디어는 많으나 논의가 되지 못한 채 묻혀 버리기 십상이다.

한국의 각종 경비절감운동이나 달러.금 모으기운동 등이 다른 나라에선 찾아볼 수 없는 구국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의 큰 자산은 바로 활력이다.

한국이 활력을 바탕으로 시장원리에 적응하려는 개혁을 성공시킨다면 일본은 한국을 다시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앞장서서 개혁을 해본 적이 없으며 늘 미국을 흉내내기에 그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패잔병처럼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한국의 중소 기업인들이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와 수출입 전선에서 활동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너무 황급한 일본 철수로 그동안 공들여 쌓아 온 대일 (對日) 신뢰 기반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최철주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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