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지금이 한은법 놓고 밥그릇 다툼 할 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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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경제위기의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한국은행법 개정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가 한은의 설립목적에 현행 물가안정 이외에 금융안정 기능을 추가하는 내용의 한은법 개정안을 내놓으면서부터다. 작금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한은의 역할을 물가안정에만 국한시킬 경우 위기대응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막상 한은법 개정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자 당사자인 한은과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등 정부기구 간에 첨예한 갈등으로 비화하고 있다.

논란의 초점은 한은의 설립 목적에 금융 안정을 추가하면서 한은에 금융회사에 대한 조사권과 시정요구권을 부여한다는 조항이다. 현재 금융회사에 대한 검사와 감독권은 모두 금융감독원에 집중돼 있다. 정부 측은 한은이 한은법을 개정해 정부의 고유 권한인 금융감독권을 넘보고 있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급기야 지난 27일에는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과 진동수 금융위원장, 김종창 금융감독원장, 이성태 한은총재 등 관련 기관장들이 모두 기획재정위에 불려 나와 설전을 벌이는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했다. 여기다 관련기관들은 언론과 국회를 상대로 상호 비방을 서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선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면 정부와 중앙은행이 밀접하게 협력해도 모자랄 시기에 경제정책 당국이 국민 앞에서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거센 풍랑에 배가 흔들리는 와중에 승객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이 선원들끼리 밥그릇 다툼을 하고 있는 꼴이다. 이래서야 정부와 중앙은행을 믿고 위기 극복에 동참하라는 소리를 국민들에게 할 수 있겠는가.

국회 기획재정위는 논란을 빚고 있는 한은법 개정 논의를 즉시 중단하기 바란다. 재정위가 추진하는 한은법 개정에 대해서는 같은 국회의 정무위원회에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정부와 한은, 국회 상임위 간에 갈등만 부르는 한은법 개정을 굳이 위기상황에서 계속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한은의 설립목적을 바꾸는 것은 조항 몇 개를 고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정부와 중앙은행의 관계를 통째로 바꾸는 중대한 문제를 담고 있다. 시간을 두고 충분한 검토와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한은과 금융감독원이 주장하는 대로 위기대응 과정에서 업무협조와 정보제공이 미흡했다면 굳이 법을 개정하지 않더라도 개선할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진정으로 위기극복을 위한 충정이라면 상호 비방과 폭로전을 벌일 게 아니라 머리를 맞대고 개선책 마련에 진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