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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아이구 money!"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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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 러시아 모스크바의 중견 은행인 '소더비즈니스방크'가 지난 5월 돈세탁 혐의로 문을 닫자 많은 예금자들이 자신의 돈을 찾기 위해 은행 앞에 몰렸다.[모스크바 AP=연합]

러시아에서 최근 확산되고 있는 은행 위기가 고유가 덕에 최고의 호황을 누려온 이 나라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2개 시중은행 폐쇄 조치로 촉발된 은행 위기가 금융권 전체로 번지면서 1995년과 98년 같은 대규모 금융 위기가 재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러시아의 은행 위기는 지난 5월 중순 중견 은행인 '소더비즈니스방크'가 돈세탁 혐의로 중앙은행으로부터 영업허가를 박탈당한 데 이어 이 은행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크레디트트라스트'은행이 자진 폐쇄조치를 취하면서 불거졌다. 두 은행의 폐쇄 이후 추가로 또 다른 은행들이 문 닫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금융권에 상호 불신이 팽배해졌다.

은행 간 단기 대출이 줄고 1일 단기 대출 이자율이 연 10%까지 치솟으면서 자금 유동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여기에 중앙은행과 금융감독 당국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조만간 부실은행 정리에 나설 것이란 소문이 계속되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됐다. 10~30개의 정리 대상 부실 은행 목록이 만들어져 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경쟁 관계에 있는 은행들은 서로 상대방을 '살생부'에 포함시키는 흑색 선전까지 펼치면서 신용 경색을 부채질했다. 사태가 악화되면서 일반 예금주들의 예금 인출도 늘어났다. 5월 위기 이후 주요 은행에서 평균 10%가량 예금이 빠져나갔다. 반면 저축률은 크게 떨어졌다. 올 들어 매월 4% 이상씩 증가하던 저축률이 최근 0.1%대로 내려앉았다.

지난 6월 중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중앙은행에 사태를 안정시키기 위한 긴급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했다. 중앙은행은 "이번 사태가 실질적 위기가 아니라 심리적 위기"라고 강조하며 "필요할 경우 은행들에 자금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부에서는 이번 위기를 러시아 경제의 발전을 가로막는 고질병인 부실 금융시스템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에는 현재 무려 1300여개의 은행이 영업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규모가 영세한데다 불법.탈법적인 영업을 통해 이익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 전체 은행의 90% 정도가 자본금 1000만달러(약 120억원) 미만의 영세 업체들이다. 은행에 대한 가계와 기업의 전반적 불신도 문제다. 현재 은행을 못 믿어 주민들이 집안에 숨겨둔 '장롱예금'의 액수만도 400억~600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기업들도 수출대금의 상당 부분을 국내가 아닌 외국 은행에 맡기는 것으로 알려진다.

러시아 정부는 최근 도입을 추진 중인 예금 보험제도를 통해 부실 은행들을 걸러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경쟁력이 있는 은행들에만 예금보험제도 가입을 허가해 예금 및 대출 업무를 하도록 하고 그렇지 않은 은행들은 영업을 못하도록 막음으로써 자연도태시키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밖에 러시아 은행들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제금융회계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모스크바=유철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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