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청론]'쾌도난마식' 부실 정리, 건실기업 불똥은 막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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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외환위기만 넘기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 올 것처럼 생각하나 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소리다.

난국의 본질은 우리기업의 부실에 있다.

기업이 부실요소를 정리하고 건실하게 경쟁력을 갖추어 외국 금융기관이나 투자가들이 신뢰하고 투자하려는 마음을 갖게끔 하는 것이 선결과제다.

먼저 기존의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투자가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경영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부실종금사의 영업을 정지시키고, 은행에 대한 국제결제은행 (BIS) 자기자본 비율을 강제하며, 고금리 정책을 유도하는 조치등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금융기관도 기업으로서 건전성을 유지하고 위험자산을 줄이기 위하여 신용도 낮은 대출을 회수하고 신규대출을 억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문제는 개별 금융기관들이 서로 다투어 이런 노력을 서두르다 보면 오랜 부동산 담보와 상호보증으로 난마같이 얽혀 있는 기업간 연결고리 때문에 경영상황과는 관계없이 모든 기업들에 부실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까 우려된다.

기업들의 상호지급 보증한도를 올 3월말까지 자기자본 규모로 줄인다면 이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우리경제의 실물구조를 와해시킬 위험마저 있다.

이 때문에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긴급조치를 통하여 기업간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소급법과 형평의 문제로 그 실현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퇴출기업에 보증한 채무를 일시에 추심한다면 아무리 건실한 기업이라도 부실을 면키 어렵다.

이것은 또다른 큰 금융부실의 소지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사적 계약관계에 정부가 나서 관여할 수도 없는 일이다.

금융기관 경영자들도 상법상 회사와 주주에 대한 책무는 성실히 지켜야 한다.

그러나 기업의 바탕이 무너지면 금융은 그 존립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사실 앞에서는 국가경제와 금융발전을 위해 대승적 리더쉽을 발휘하여 중지를 모으고 건실한 기업이 현상을 유지토록 하면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개별 금융기관은 건전 금융원칙에 입각하여 거래기업의 사업성과 경영력을 철저히 분석하고 이에 따른 처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한계기업은 과감히 퇴출시키고 연계된 보증채무의 추심에 대하여는 보증한 기업과 금리, 담보, 기간등의 재협상과 분담 배분의 협의를 통하여 건전한 보증기업이 도산하는 일은 막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매각, 분사 (分社) , 합병등 적극적인 구조조정을 통한 기업의 협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법원에 관리나 화의를 신청한 기업에 대하여도 엄격히 적용하여 그 처리를 촉진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노력을 통하여 금융기관과 기업과의 대차관계도 국제적 수준으로 한 차원 올라가야 할 것이며 업계는 투명한 경영과 금융기관의 채권보존을 위한 노력에 협조하는 성실성을 보임으로써 신뢰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도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향으로 시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고 신뢰와 협조가 더욱 절실하다.

윤병철<하나은행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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