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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업체 '쌈지' 톡톡 튀는 문화실험…잡지에 작가 전시공간 제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돈이 궁한 시대에 기업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비용줄이기 상식 첫번째. 기업이 굴러가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안 되는 불필요 경비, 즉 모든 문화사업 지원을 전면 중단한다.

한가지를 덧붙이면, 당장 매출과 연결되는 가시적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기업 이미지 광고비를 대폭 삭감한다.

광고를 게재하는 매체수도 줄인다.

그런데 '쌈지' 라는 캐주얼 가방 브랜드로 젊은이들 사이에 잘 알려진 ㈜레더데코 (이하 '쌈지' 로 표기) 는 이 기본상식을 완전히 거스르는, 엉뚱한 쪽으로 가고 있다.

현재 한두사람에 그치고 있는 작가 지원을 오히려 넓혀가고 있다.

또 자사 제품과는 전혀 상관없이 한 작가의 작품으로 잡지 광고지면 한 면을 그득 메우는 이미지 광고를 최근 더 많은 매체로 확대했다.

이 뿐이 아니다.

새로운 브랜드 '쌈지 스포츠' 의 외국 바이어를 위한 런칭쇼에 쓰인 이미지 사진 역시 무명의 젊은 사진작가 이재용씨에게 전권을 주어 제작했다.

쇼에서 이 사진은 하나의 작품으로 소개됐음은 물론이다.

이쯤 소개하면 “IMF 한파 속에서 아직도 정신 못 차린 팔자 좋은 기업이 남아있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꺼풀만 벗겨보면 오히려 비용을 절감하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기발한 문화실험이 진행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케팅과 미술의 만남을 통해 기업 이미지를 높이는 홍보를 가장 싼 비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패션업계의 광고 추세는 직접 상품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럴듯한 가상의 이미지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 하는 것이 주요 관건이다.

이를 위해 기업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광고를 제작한다.

하지만 쌈지는 다르다.

광고가 게재될 지면만 빌리면 된다.

나머지는 작가들이 그냥 채워준다.

지면 하단에 'ssamzie' 라는 브랜드가 조그맣게 들어갈 뿐 어디에도 쌈지의 입김은 작용하지 않는다.

현재 쌈지 잡지광고는 월간디자인과 현대문학.몸.보고서 보고서 등 예술 전문지와 아시아나 기내지에 게재되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김수자와 임옥상.이불.조덕현.강수미 등의 작품이 소개됐다.

작품사진을 무료로 제공한 작가들로서는 일반인들에게 작품을 보여주는 흔치 않은 기회를 잡은 것이고 쌈지는 광고제작에서 돈 한푼 안 들이고 고급 문화이미지를 얻은, 그야말로 누이좋고 매부좋은 결과를 낳았다.

쌈지 스포츠의 이미지 사진 제작도 마찬가지. 이재용씨에게는 필름값 등 실비만 제공했다.

광고주 요구가 아닌 본인의 입맛대로 작품을 만들 기회가 적은 소장 사진가에게는 활동무대를 주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제작비용을 줄인 셈이다.

쌈지는 또 전위적인 작업으로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불씨의 97년 뉴욕 현대미술관 (MoMA) 개인전 당시 미술관 측에 전시비용을 댔다.

조금 방향은 다르지만 젊은 작가들의 창작을 지원하는 '가난한 예술여행' (가제)에도 1억원에 가까운 거금을 내놓는 등 작가 지원을 확대했다.

이 아시아 문화체험 이벤트는 미술과 사진.건축.음악.무용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70년대생 작가 10명을 선발해 오는 25일부터 2월4일까지 태국 치앙라이를 탐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작가들은 이 기간 동안 마음대로 창작활동만 하면 된다.

사진가는 사진을 찍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비디오 작가는 촬영을 하고. 단 하나의 조건은 이들이 모두 쌈지 제품을 입고 활동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이들의 결과물은 오는 4월 '쌈지 아트북' 으로 출간하게 된다.

결과가 나와봐야 하겠지만 이를 그대로 제품 카다로그로 쓸 생각도 갖고 있다고. 쌈지는 어떻게 문화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을까. 쌈지 천호균 대표는 “시대의 조류를 가장 앞서서 읽어나가는 분야는 예술” 이라며 “이걸 모르면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상품의 흐름도 알 수 없다” 고 말한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브랜드 쌈지를 처음 선보인 93년부터 영원한 테마를 아트로 잡고 상품 컨셉을 이에 맞췄다고 한다.

위기 극복을 위한 다른 기업과의 차별화를 예술로 잡아 승부수를 띠웠고, 벌써부터 짭짤한 수확을 거두고 있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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