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14년간 청와대에 막걸리 납품한 박관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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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던 날에도 청와대에서는 우리 막걸리를 받아 갔습니다. 박 대통령은 양주를 먼저 마시고, 다음에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어 마시는 독특한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미처 막걸리를 마시기 전에 돌아가셨죠."

1966년부터 79년까지 14년간 청와대에 막걸리를 공급했던 박관원(73) 고양탁주합동제조장 대표이사. 그의 집안은 증조부가 15년 경기도 고양시 주교동에 '배다리 술도가'를 창업한 이래 아들 상빈씨까지 5대째 양조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일은 그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숙원이었던 술 박물관(배다리 박물관)을 개관하고 집안의 내력을 정리한 '전통주조백년사'를 발간했기 때문이다. 그는 박물관과 책을 통해 가업을 이으며 겪은 숱한 애환과 비화를 세상에 드러냈다. '박정희와 막걸리'는 그 중심에 있다.

정작 박 대표는 박 대통령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인연은 우연히 맺어졌다. 한양골프장에 들렀던 박 대통령이 인근 실비집에서 능곡양조장의 막걸리를 맛본 뒤 "술 맛이 좋다, 어디 술이냐"고 물은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청와대 직원이 찾아와 매주 1~2말씩 대통령이 마실 막걸리를 실어갔다. 당시에는 쌀로 막걸리를 빚을 수 없었지만 '대통령용 막걸리'만큼은 특별히 쌀과 찹쌀로 빚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박 대통령 본인도 몰랐을 것이라고 박 대표는 말했다.

'청와대 납품 양조장'이었지만 별다른 특혜는 없었다. 오히려 정보기관에서 수시로 찾아오고, 막걸리 보관실 열쇠도 관할 경찰서에서 관리해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권위주의적인 분위기 때문에 양조장 이름이 바뀌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청와대에서는 당시 '능곡양조장'을 '원당양조장'이라 불렀다. 애초 실비집 주인이 대통령에게 "원당양조장의 술"이라고 잘못 말했기 때문이다. 이후 박 대표는 명칭을 바꿔달라고 부탁했지만 담당자에게선 "각하가 그렇게 부르시니 우리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74년 지역 양조장들이 합동제조장으로 통합됐지만 '대통령 막걸리'는 박 대표가 계속 관리했다. 그러다 10.26이 터졌고, 이후 청와대에는 더 이상 막걸리가 들어가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막걸리 산업도 사양세로 들어섰다.

박 대표의 막걸리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도 보내졌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즐겨 마셨다는 막걸리를 맛보고 싶다"는 김 위원장의 요청으로 2000년 현대그룹에서 '고양막걸리'를 북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원당역 인근에 위치한 '배다리 박물관'은 근 100년을 이어온 술 도가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술제작도구와 술병 등 소품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 내부에는 대통령 막걸리 전용 보관실과 당시의 실비집도 재현해 놓았다.

글.사진=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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