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침묵, 이상득의 부재…경주는 ‘그림자 전쟁’ 중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1호 10면

(좌)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25일 자신의 지역구인 대구시 달성군에서 열린 ‘비슬산 참꽃제’에 참석해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대구=송봉근 기자 (우)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오른쪽)와 이상득 의원이 24일 전주 유세 도중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 25일 오전 대구 비슬산 자연휴양림 앞 광장. 지역구(달성군) 행사인 ‘비슬산 참꽃제’에 참석하기 위해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모습을 보이자 시민들이 ‘박근혜’를 연호했다. 그가 지나가는 주요 동선마다 ‘대한민국 지도자 박근혜’ 같은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기념식장 주변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줄을 이었다.

4·29 재·보선 D-3

인근 경주 지역 재·보선에서 한나라당 정종복 후보와 무소속 정수성 후보 간에 박빙의 대결이 펼쳐지는 가운데 이뤄진 이날 박 전 대표의 대구 방문을 놓고 그가 자신의 특보 출신인 정수성 후보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지지 의사를 표시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시각을 의식한 듯 박 전 대표는 이날 정치적인 언급을 일절 하지 않았다. 가벼운 덕담으로 축사를 마무리하고 뒤이어 행사 참가자들과 비빔밥 오찬을 했지만 취재진의 질문에 끝까지 입을 다문 채 서울로 향했다.

24일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를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가를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 같은 시간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 행사인 포항 한마음 걷기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이번 재·보선 기간 부평을과 전주 지역 선거 유세에는 참여했지만 정작 자신의 최측근인 정종복 후보가 출마한 경주에는 가지 않았다. 한 측근은 “본인이 경주에 가면 친이니 친박이니 분명 말이 나올 것 같아 아예 가지 않겠다고 했다. 마음속으만 정종복 후보의 당선을 기원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 초반에 터진 정수성 후보 사퇴 압력 파문에 자신의 이름이 거명된 데다 이번 경주 재·보선을 사실상 ‘박근혜 vs 이상득’의 구도로 보는 시선에 이 의원 자신이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측근들의 얘기다. 전략적으로도 경주 정서를 감안해 박 전 대표와 각을 세우는 것보다는 인물론과 지역발전론을 내세워 차분히 표심을 공략하는 것이 정종복 후보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왼쪽)와 손학규 고문(오른쪽)이 19일 인천 부평을에서 홍영표 후보와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뉴시스

이번 4·29 재·보선은 각 후보들의 인물·정책 대결보다는 그들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거물 중진들의 행보와 선거 결과에 따른 정치적 위상 변화에 더욱 관심이 가는 이색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일각에서는 링 위의 선수보다는 링 밖의 세컨드들에게 더 관심이 쏠리는 ‘그림자 선거’라는 분석도 나온다.

선수보다 링 밖이 더 관심
박 전 대표의 이날 대구 행사에 친박 의원들은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공보특보격인 이정현 의원과 인근 지역구 의원인 이해봉·조원진 의원만이 행사장에 왔다. 친박 의원들의 대규모 수행이 오히려 당 내외의 역풍을 부를 수 있음을 감안한 듯 박 전 대표가 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는 후문이다. 정수성 후보도 이날 박 전 대표를 만나러 오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의 이날 대구 방문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적잖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게 한나라당 내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오해를 사지 않겠다”며 지난달 문중행사와 24일 이의근 전 경북도지사 영결식 같은 대구·경북의 주요 행사에 불참했던 그가 이날 대구를 찾은 것은 경주 선거에 대한 관심을 은연중에라도 표시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문제는 선거 이후의 후폭풍이다. 두 정씨 후보 중 누가 당선되더라도 한나라당의 만성 고질병이 된 친이-친박 간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란 전망이다. 당장 박 전 대표의 수도권 유세 지원 거부를 놓고 당내 논란이 일고 있다. 홍준표 원내대표가 “(박 전 대표가 유세에) 나서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도 응어리가 쌓인 듯한 모습”이라고 말할 정도로 친이 주류에 대한 박 전 대표의 반감과 상처는 깊다.

반대로 친이 주류 측은 경주 선거의 특수성까지는 인정하더라도 다른 접전 지역의 지원 요청까지 거절하고 있는 박 전 대표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고 있다. 친이 성향의 한 재선 의원은 “재·보선의 경우 고령층과 여성층의 투표 참여율이 높아 박 전 대표의 지원이 꼭 필요한 상황”이라며 “박 전 대표가 자신의 모양새만 생각해 부평을처럼 초접전 지역에 대한 지원을 끝까지 거부할 경우 당내 비난여론이 고조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득 의원의 위상 변화도 주목된다. 경주에서 정종복 후보가 무난히 당선될 경우 ‘정권 2인자’라는 정치적 위상은 더욱 공고해지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의 행보는 앞으로 상당 부분 위축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최근 자신의 보좌관 출신인 박영준 총리실 국무차장의 포스코 회장 인선 개입 의혹이나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는 그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공교롭게도 친이계 핵심의 또 다른 축인 이재오 전 의원은 이날 ‘하이 서울 자전거대행진’에 참석해 귀국 후 첫 공식활동에 나섰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의 ‘꿈’인 전국 정당화도 이번 경주 선거에서 시험대에 오른다. 이 총재는 요즘 자신을 10년 가까이 수행한 이채관 후보 선거운동에 ‘올인’하고 있다. 하지만 친이-친박 구도 속에 이 후보가 저조한 득표에 머물 경우 선진당의 목표는 더욱 멀어질 전망이다.

DJ는 귀향길 정세균 손 들어줘
사실상 집안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전주 덕진과 완산갑 재·보선에서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의중이 막판 변수가 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이 23일 하의도 생가 방문길에 민주당 한명숙 고문을 만나 “이번 선거는 반드시 민주당이 승리해야 한다. 무소속 한두 명이 당선돼 복당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지자 민주당 지도부는 반색하고 있다. 특히 무소속 신건 후보의 바람막이에 골몰하던 완산갑 이광철 후보 측은 크게 고무된 상태다. DJ의 대변인 격인 박지원 의원조차 “이번 김 전 대통령의 방문은 부평과 전주에서 집토끼(호남 출신 고정 지지층)를 단속해야 하는 민주당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동영·신건 후보와의 친분을 감안할 때 다소 의외였던 DJ의 이번 ‘훈수정치’를 놓고 야권에서는 DJ가 호남의 분열에 상당한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한다. 동교동계 출신인 한 측근 정치인은 “민주당 후보가 낙선할 경우 김 전 대통령의 영향력이 약화될 것이란 말이 나올 수 있음에도 선뜻 나선 것은 그만큼 그가 호남권의 분열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동영 후보 우위의 선거구도를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많다. 지난해 총선 때 이희호 여사의 지원유세에도 차남인 홍업씨가 낙선할 만큼 DJ의 호남 영향력이 과거만 못한 데다 전북의 지역정서가 전남과는 또 다른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호남 분열의 직접적 원인이 된 ‘정세균 대표와 정동영 후보 간의 이른바 ‘정(丁)-정(鄭) 대결’은 두 명 모두 적잖은 상처를 입고 끝나는 ‘승자 없는 게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차기 총선 호남 불출마 선언까지 한 정 대표는 당장 전주 완산갑과 부평을 선거 결과에 따라 당권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정 후보는 설사 당선된다 해도 무소속 바람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의원직에 집착해 ‘대의를 저버린’ 정치인이란 비판에 시달릴 공산이 크다.

정몽준·손학규도 위상 변화 노려
이번 선거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는 기회로 활용하는 정치인들도 더러 눈에 띈다. 지난 총선에서 중진급 낙선자들이 많았던 민주당의 경우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유세장을 발로 뛰며 민주당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김근태·한명숙 고문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7월 전당대회 이후 강원도 춘천 농가에서 칩거했던 손학규 전 대표도 부평과 시흥 선거현장을 누비고 있다. 정세균 대표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정치에 복귀하는 모양새를 갖췄다.

손 전 대표는 특히 평소 친분이 두터운 민주당 김윤식 시흥시장 후보의 당선에 공을 들이고 있다.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선전할 경우 손 전 대표의 복귀는 더욱 힘을 받게 된다. 민주당 관계자는 “선거가 끝나면 정세균계에 대한 당내 비주류와 친 정동영계의 공격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며 “이에 맞서 정세균계는 손학규계와의 단결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 체제도 시험대에 올랐다. 부평을과 경주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질 경우 당 대표로서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는 것은 물론 내심 꿈꾸고 있는 ‘10월 재·보선 영남 출마→18대 하반기 국회의장’ 구도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당내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박 대표가 고군분투했지만 나이와 대중적 인기도 등을 고려할 때 내년 지방선거까지 당 얼굴로 남기에는 다소 약하지 않으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정몽준 최고위원의 위상 변화 가능성을 거론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지역 연고가 있는 울산 지역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며 한나라당 박대동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대중적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아직 당내 기반이 취약한 정 최고위원으로서는 이번 재·보선이 당에 착근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친이-친박의 대립 구도가 첨예화할수록 정 최고위원에게 보다 많은 활동공간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