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를 수출한다]下.맨해튼서 주가 올린 '패션코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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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저런 패션도 다 있습니까?” 93년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씨가 파리 프레타포르테 (기성복컬렉션)에 첫 참가했을 때 서구인들이 보인 반응이다.

직선적이고 몸에 꼭 맞는 서양식 재단만 보아온 그네들의 눈에 온통 둥글고 풍성한 한복의 선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뿐일까. 쪽빛.팥색.옥색…우리 고유색들은 서구인들의 색감에 새 지평을 열어주었다.

물론 이씨가 서구의 패션쇼에 전통한복을 들고나간 건 아니다.

한복의 선과 색을 응용해 만든 서양옷, 즉 일종의 개량한복을 제작해 내놓은 것이다.

국내 패션계에선 그의 세계무대진출을 놓고 서양패션을 배운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기대보다 우려가 더 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결과는 이씨의 판정승. 마침 서구 패션계에 불던 동양풍 유행은 '한국적인' 패션의 주가를 크게 올려놓았다.

이씨의 '모험' 은 최근 현실적인 판매로도 이어지기 시작했다.

추동 옷들 수백벌을 주문했던 뉴욕의 최고급백화점 버그도프굿맨은 고객들의 반응이 좋자 재주문을 해왔다.

또 내년도 춘하용 옷들에도 홍콩의 조이스등에서 주문이 쏟아지는 중. "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큰 경쟁력을 갖는다' 는 제 신념이 시대상황과 맞아떨어진 셈이지요. " 그의 말대로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IMF시대, '우리옷의 세계화' 라는 외길을 걸어온 이씨가 제 물을 만난 셈이다.

비단 이씨뿐이 아니다.

세계무대로 눈을 돌리는 많은 패션디자이너들이 '한국적' 인 디자인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하고 있는 디자이너 문영희씨는 단순하고 현대적인 기존 라인에다 전통의 요소를 가미, 현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첨단유행 아이템인 패딩코트라도 문씨는 화학솜 대신에 목화솜을 넣고 겉감도 인조섬유 대신 명주와 숙고사를 이중처리한 소재를 사용해 독특한 제품을 탄생시켰다.

"한국 디자이너로서의 자기 색깔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른 셈" 으로 문씨는 평한다.

또한 지난 한해 국내에서 열린 각종 컬렉션 무대에도 한국적인 디자인의 옷들이 넘쳐나 굵직한 유행 조류를 형성하기도 했다.

청자.백자의 선을 따온 수트, 매화.봉황.용등 전통문양의 프린트와 자수, 실크.리넨.모시등 고유소재의 활용까지 아이디어는 무궁무진. 이처럼 패션 디자이너들이 한국적인 디자인의 개발에 열을 올리는 것과 관련, 업계에선 "뒤늦은 감이 있지만 반가운 일" 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패션강국 일본의 경우 70년대부터 디자이너들이 해외시장을 개척하면서 흰색.검정색을 주조로 한 배색, 긴 깃과 폭넓은 소매등 기모노를 연상시키는 선들로 일본 패션이라는 한 흐름을 만들어 냈다.

"겐조가 고름을 단 한복치마 형태의 드레스를 내놓는등 일본 디자이너들이 한복의 장점을 이미 숱하게 차용해버린 것이 아쉽기만하다" 고 한국패션네트의 김명석 대표는 지적한다.

섬유산업연합회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섬유.의류 수출액은 약50억5천만달러 (추정액) .전년에 비해 3.6% 줄어든 액수로 90년대들어 이 분야 수출은 계속 감소추세다.

업계에서는 "고환율로 가격경쟁력이 높아졌다지만 동남아.중국등에 비하면 차별성이 없다" 며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한국적 디자인의 개발은 부가가치를 높이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한국디자인카운슬 김영순 대표는 "일본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먼저 한 나라의 전통과 문화가 붐을 일으킨 뒤 상품이 팔리기 시작하는 것" 이라면서 "개개 디자이너들뿐아니라 국가와 기업이 나서서 한국의 이미지 조성작업에 나서야한다" 고 강조했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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