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수대]금 모으기 운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05~6년 일본은 대한제국에 1천1백50만원의 차관을 들여왔다.

식민지 건설의 정지작업 비용으로 쓰면서 대한제국의 재정적 자주성을 무너뜨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국권 훼손을 걱정한 서상돈 (徐相敦).김광제 (金光濟) 등이 대구에서 일으킨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면서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애초에이 운동은 온 국민이 담배를 끊어 그 담뱃값을 모으자는 형태로 시작됐지만 일단 불길이 붙자 각계각층의 눈물겨운 정성이 모여들었다.

특히 부녀자들의 패물 헌납은 당시 일반국민의 위기의식과 애국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 운동은 의병활동과 함께 합방 전 가장 중요한 저항운동이었을뿐 아니라 빈부귀천의 구분 없이 각계각층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국민국가의 건설을 예고한 시민운동의 효시로도 뜻깊은 것이었다.

1년이 지나도록 운동의 불길이 사그라들 줄 모르고 열기를 더해가자 당황한 통감부는 온갖 와해공작을 꾸몄다.

1908년 가을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베셀 (E T Bethell.裵說.영국인) 과 주필 양기탁 (梁起鐸) 이 모금 일부를 유용했다는 거짓 혐의로 고발, 구속한 것은 그 가장 악랄한 예다.

집요한 공작 앞에 운동의 지도부가 분열을 일으키면서 결국 운동의 열기도 식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이합방을 막아내지 못한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역부족으로 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국민의식과 시민의식의 발현이란 점에서 우리에게는 소중한 정신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일제하 독립운동의 정신도 이 운동에서 발원한 바가 적지 않았다.

주택은행.KBS 등이 벌이고 있는 '금모으기 운동' 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고 있는 데서도 같은 정신의 연장을 본다.

많은 참여자는 헌납보다 위탁을 택하고 있으며 그 경우 시중가보다 꽤 높은 가격을 예상한다 하니 90년 전의 헌납운동과는 시속 (時俗) 의 차이를 느낀다.

그러나 맡기는 금붙이들이 각자에게 이런저런 기념의 뜻을 가진 물건임을 생각하면 그들의 나라 걱정하는 마음을 낮춰 볼 일은 아니다.

어느 은행원은 패물을 위탁하면서 상패 하나는 헌납했다.

상을 받은 명예는 자기 것으로 지키되 상패의 재료인 금은 사회에 돌려보내겠다는 뜻이다.

이런 합리적 정신은 90년 전의 선인들보다 더 발전한 면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여의도 지점에 금배지가 얼마나 들어올지 궁금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