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짐에 야위는 중산층…계층기반 와해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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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와 정치권이 국제통화기금 (IMF) 긴급자금 신청에 이은 경제위기를 주로 중산층에 부담지우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다가 자칫 중산층이 와해돼 소수의 부유층과 대다수의 저소득층으로 이뤄진 '동남아' 형태의 사회구조로 바뀌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최근 정부와 정치권이 내놓고 있는 각종 제도개혁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부유층에 혜택을 주고 중산층에는 짐을 지우는 것들이다.

무기명 장기채는 부유층 특혜의 대표적 사례다.

지하자금을 양성화한다는 명분으로 정치권이 밀어붙인 이 조치가 과연 얼마나 위기경제에 도움이 될지는 이론이 분분하다.

효과가 미심쩍은 반면 부작용은 분명하다.

무기명 장기채를 통해 상속.증여세를 내지 않고 마음대로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또 금융소득 종합과세가 유보됨에 따라 수백억원의 금융자산이 있는 사람이나 1천만원의 저축이 있는 사람이나 똑같은 이자소득세를 내게 됐다.

소득이 많은 곳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기본 원리가 깨진 것이다.

중산층을 대표하는 봉급생활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국민연금도 완전히 거꾸로 간 정책이다.

정부는 연금액을 가입기간 평균소득의 70%에서 40%로 낮추고, 매달 월급에서 강제로 떼는 연금보험료는 9%에서 12.65%로 단계적으로 높이기로 했다.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도 60세에서 단계적으로 65세까지 늦췄다.

이필상 (李弼商) 고려대교수는 "정부가 국민의 생계를 위한 돈을 맘대로 써놓고 연금제도를 개악하는 것은 국민재산의 단순한 남용차원을 넘어 죄악" 이라고 주장했다.

IMF이후의 경제상황도 중산층의 어깨를 무겁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금리가 가장 큰 문제다.

대출금리가 14%선에서 18%선으로 치솟았다.

주택매입이나 전셋돈 마련 등을 위해 은행 빚 없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점을 감안할 때 부담이 상당하다.

더욱이 대부분의 직장에서 올해 임금이 동결 내지 삭감될 것은 분명하고 각종 생필품 가격도 두자릿수 인상이 다반사인 터에 생활의 어려움은 더욱 심각해졌다.

게다가 올해는 저성장과 정리해고제 등의 도입으로 실업자가 1백만명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올해 직장을 잃을 사람들 대부분은 중산층을 대표하는 봉급생활자들이다.

고용보험제 등이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부실한 상황에서 실직은 가정경제의 파탄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실업증가는 중산층 기반확대를 통한 사회안정에 엄청난 악영향을 몰고올 것이 분명하다.

이에 따라 어려울때 일수록 중산층을 배려하는 정책을 펴야한다는 지적이 많다.

배준호 한신대교수는 "고소득 자영업자에 대한 부가가치세.소득세를 올리고 상속.증여세를 빠짐없이 부과해야 한다" 고 지적했다.

경제난이 수습되는대로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부활하고, 그동안 방만하게 운용돼온 연.기금의 대수술도 필요하다.

선심성 예산을 과감히 잘라내고, 고용보험 등 실업자 대책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경제난에도 꿈쩍 않고 있는 사 (私) 교육비를 끌어내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물가와 금리 안정을 위해서도 최대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빈부 격차가 심해져 중산층이 붕괴되면 경제재건을 위한 응집력도 그만큼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현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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