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국인에게 고함]4.<끝> 경제파탄 화근은 교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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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25년간 다섯차례의 한국 방문과 한차례의 북한 방문을 통해 한국을 알고 한국민을 사랑하게 된 프랑스의 노 (老) 기자로서 98년 새해를 맞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감회는 남다르다.

어떻게든 올 한해 한국이 잘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다.

97년은 한국민에게 어두운 한해였다.

아무리 맹렬한 호랑이라도 갑자기 숨을 헐떡이게 될 수 있으며 기적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한국민들은 깨닫게 됐다.

그러나 나는 한국민의 애국심과 활력.재능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한국이 결국은 곤경에서 벗어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한국인 위기극복 믿어 더구나 탈 (脫) 냉전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여전히 짓누르고 있는 냉전의 부담이 언제까지고 계속되지는 않으리라 믿는 것도 한국의 위기극복을 확신하는 이유다.

또 세계 11위 경제대국의 파국은 세계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점도 한국의 재기를 내가 믿고 있는 근거다.

지금부터 꼭 1년전 노동시장에 유연성을 도입하기 위한 정부 법안에 반대, 노동계가 주동한 대대적 파업사태를 보면서 한국의 위기 가능성을 예상했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노동의 유연성 문제는 프랑스에서 지금까지도 사용자와 근로자간의 가장 뜨거운 쟁점사항이 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에 이르지 못함으로써 프랑스는 비록 한국이 현재 처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12.5%에 달하는 고 (高) 실업률과 범죄율의 급격한 증가, 대도시 주변의 만성적 치안불안 등 사회문제가 그치지 않고 있다.

본질적 문제는 파리에서나 서울에서나 마찬가지다.

임금상승은 임금이 싼 나라의 경쟁력을 강화시켜 기업들은 점점 생산시설을 임금이 싼 나라로 옮기게 되며 이는 자연히 실업증가로 이어진다.

스페인 등 임금이 상대적으로 싼 나라로 이미 생산시설의 상당부분을 옮긴 르노 자동차는 노조의 엄청난 반발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벨기에 빌보르드 공장을 폐쇄했다.

그러면서도 러시아에는 새로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임금.고용 擇一불가피 프랑스 총리였던 레몽 바르가 "결국 임금과 고용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고 말한 것은 이미 10여년 전이었다.

그 당시 내가 사장으로 재직하던 르몽드는 부도직전의 경영위기에 몰렸었다.

르몽드 직원들은 바르의 말을 이해했고 임금삭감안을 수용했다.

그런 점에서 노동계의 지지를 받고 있는 김대중 (金大中) 씨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을 위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계의 동의 없이는 절대 위기극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金당선자가 당선되자마자 한국의 불가피한 구원자로 등장한 IMF의 요구사항과 관련, 한국이 보여줘야 할 자세에 대해 정치.경제 지도자들과 함께 합의를 도모한 것은 잘한 일이다.

IMF가 '충격요법' 에 따라 처방한 쓴약을 삼켜야 하는 한국 근로자들 눈에는 IMF의 요구가 무리하게 보일 수도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과도한 공공채무에서 문제가 비롯된 게 아니라 재벌들의 끝모르는 욕망에서 빚어졌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재정긴축을 요구하는 IMF의 처방엔 사실 위험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문제가 어디서 비롯됐건 결국 잘못은 '교만' 이란 한가지로 귀착된다.

지배욕과 과시욕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재벌에 제동을 걸기는 커녕 도리어 봉사한 경우가 많았다.

은행들도 기업들이 제시한 투자계획의 수익성을 따져보는 일에 너무 소홀했다.

미셸 캉드쉬 IMF총재가 자금지원 대가로 '기업의 구조와 경영 개선' 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열쇠는 의지와 단결력 바로 이 점이 金당선자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

이는 그야말로 구조적인 문제다.

나머지는 대개 경기 (景氣) 적 문제에 불과하다.

재벌이 사회의 주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재벌 자체의 구조적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 전체의 구조 문제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金당선자는 권력의 새로운 체계와 메커니즘을 고안하고 정착시켜 굴러가게 해야 한다.

이러한 시스템과 메커니즘의 고안.정착은 국가의 진정한 민주화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각 개인과 사회단체, 공공이나 민간의 각 기관이 내일의 한국을 고안하고 기능토록 하는데 동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한국인은 자기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으며 외부세계에 내일의 한국에 대한 신뢰를 심어줄 수 있다.

따라서 빈틈없는 경제정책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치질서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높은 위상을 되찾을 수 있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한국민의 의지와 단결력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 한국이 보여준 것이 물질적인 생산능력이었다면 이제는 한국이 활기차고 효율적인 참다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줄 차례다.

金당선자는 용기와 결단으로 한국민을 이런 길로 이끌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한국민은 그 길을 따라가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된다.

당선자가 그 길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적극 도와줘야 한다.

앙드레 퐁텐 <전 르몽드지 사장>

<약력>

▶1921년 파리 출생

▶파리대 법학부 및 소르본대 졸업

▶르몽드 입사 (48년) , 외신부장 겸 논설위원 (51년) , 주필 (68년) , 편집국장 (70년)

▶미국의 아틀라스지가 선정한 '76년 세계의 편집국장'

▶르몽드 사장 (85~91년)

▶저서 : '해빙시대의 대서양동맹' '냉전사' '시민냉전' '최후의 4반세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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