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신뢰 쌓아야 위기 헤쳐갈 힘 얻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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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은 국민의 삶에 희망을 줘야 하는데 오히려 좌절만 안겨준다. 이런 악순환이 언제까지 되풀이돼야 하나?”

23일 수덕사에서 만난 설정 스님은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스님에겐 승격이 있다. 한국 불교가 승가의 원형을 되찾으려면 이 승격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성호 기자]

23일 충남 예산의 수덕사에서 설정(雪靖·67) 스님을 만났다. 이달 초 산중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덕숭총림 수덕사의 방장(총림의 수장)으로 추대됐다. 설정 스님은 “우리 사회에는 신뢰가 없다”며 시국을 염두에 둔 듯 쓴소리부터 던졌다. “정치인은 정치인답고, 스님은 스님다워야 하는데…”

스님은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말을 꺼냈다. “신뢰가 없으면 설 수가 없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라. ‘무신불립’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믿음이 없으니 정치하는 사람들이 모리배처럼 보이는 것 아닌가. 우리 사회에 신뢰가 있으면 어떠한 국가위기, 어떠한 경제위기도 헤쳐갈 힘을 얻게 된다.”

설정 스님은 바깥 세상만 겨냥하지 않았다. ‘한국 불교’를 향해서도 회초리를 때렸다. “출가자에겐 출가 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스님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스님은 한국 불교가 ‘옛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종단 정치판을 향해 불교의 본질과 멀어졌다며 죽비를 내리쳤다. “이제 불교의 원형을 회복해야 한다. 승가가 본래 모습을 지킬 때 사부대중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그럴 때 인생의 길도 제시할 수 있다. 삭발하고 입산수도하는 것이 잘 먹기 위해서,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명예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지 않나.”

설정 스님은 ‘승가의 존재이유, 출가의 정신’을 이렇게 되짚었다. “출가정신이 뭔가. 오직 부처님의 무상한 진리를 증득하는 것이다. 그걸 통해 중생의 괴로움을 건져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세 가지 기본원칙도 제시했다. “곧 있으면 부처님 오신 날이다. 다들 연등을 켠다. 제대로 등을 켜려면 그냥 등불이 아니라 진리의 등을 켜야 한다.” 스님은 부처님 마지막 말씀이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라며 “자성의 등불, 가르침의 등불을 켜야 한다는 얘기”라고 소개했다.

그 다음으로 ‘공심(公心)’을 꼽았다. “스님은 사인(私人)이 아니라 공인(公人)이다. 그러니 자기 것이 없다. 내 모든 걸 사람들에게 회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원력’을 들었다. 설정 스님은 “이 위대한 진리를 꼭 성취하겠다는 큰 원력을 놓쳐선 안 된다”며 승려의 본분을 다시 강조했다. “이 셋 중 하나만 빠져도 스님으로서, 수행자로서 결격 사유가 있는 사람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도 스님은 한마디 했다. “사바세계에서 장애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함)’와 같다. 장애를 장애로 받아들이면 헤어나기 어렵다. 장애가 오면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해야 한다. 희망과 용기는 늘 기회를 만든다.”

예산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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