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글래스]오페레타 '박쥐'…중산층 거품 맵짜게 풍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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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모든 걸 잊으면 우린 행복해. ' 지난 3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막이 오른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 중 제1막에서 알프레드 (테너 김재형) 와 로잘린데 (소프라노 나경혜)가 부르는 2중창의 제목이다.

로잘린데는 남편 아이젠슈타인 (테너 안형렬) 이 법정모독죄로 5일간의 구류형을 받자 가수 알프레드와 놀아나고 아이젠슈타인은 연미복 차림으로 파티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를로프스키 공작 (메조소프라노 장현주) 의 저택에선 샴페인을 곁들인 무도회가 벌어지고 여기엔 아이젠슈타인의 하녀 아델레 (소프라노 윤이나)가 백작부인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은 언젠가 가면무도회에서 '박쥐' 차림으로 놀림을 받았던 팔케 (바리톤 박흥우)가 아이젠슈타인을 골탕먹이려고 꾸민 조작극이다. 19세기 오스트리아 빈을 무대로 한 오페레타 '박쥐' 는 증권시세가 곤두박질하는 경제공황을 며칠 앞두고도 연일 샴페인과 춤에 흠뻑 젖어 상류사회의 라이프 스타일을 동경하던 중산층들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경제현실을 외면한채 '거품 경기' 에 들떠 귀족 흉내내기에 바쁜 그런 사람들이다.

가면무도회에서 아이젠슈타인은 르나르 후작, 로잘린데는 헝가리 백작부인, 형무소장 프랑크는 바스티유 공작으로 행세한다.

등장인물들은 이튿날 새벽 6시까지 샴페인과 왈츠로 밤을 꼬박 지새고도 아이젠슈타인 대신 알프레드가 갇혀있는 감옥으로 몰려간다.

이곳에서 서로의 정체가 밝혀진 후에도 춤을 추면서 웃고 즐기는 것으로 이 작품은 막을 내린다.

오페레타 '박쥐' 는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인가, 아니면 현실의 참담함을 과거에 비추어보는 슬픈 회상인가.

초연 직후 경제공황에 직면한 오스트리아 빈 시민들은 이 공연을 즐길 여력이 없었다.

당장 먹을 양식을 걱정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초연 후 16회만에 막을 내렸다.

이 단명했던 오페레타가 연말연시의 고정 레퍼토리로 자리잡은 것은 20년후 구스타프 말러가 빈국립오페라극장 무대에 과감히 상연하면서부터다.

이번 공연의 특징은 독일어 가사를 모두 우리말로 번역했다는 점. 로잘린데역으로 데뷔한 소프라노 나경혜의 풍부한 성량과 무대연기가 돋보였고 소프라노 윤이나와 테너 김재형의 활약은 오페레타 특유의 쾌활한 분위기로 작품을 이끌어가는데 성공했다.

극중 파티장면에 등장하는 컬트3총사와 색소폰 주자 이정식, 간수역을 맡은 개그맨 김의환, 이다역을 맡은 탤런트 조미령의 등장도 볼거리. 아예 97년말 서울로 시대적 배경을 옮겨 각색했더라면 어떨까. 실제로 미국에선 1930년대 경제공황기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오페레타 '박쥐' 가 제작된 적이 있다.

'박쥐' 공연은 1월4일까지 (오후6시, 4일은 오후2시 추가) 계속된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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