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BIS맞추기' 막무가내…수출금융 시스템 사실상 마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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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은행들의 수출금융 시스템이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정부의 후순위 채권매입 조치와 국제통화기금 (IMF) 등의 자금 조기지원 발표에도 불구하고 은행들은 여전히 신용장 개설 등 수출입 업무 취급을 꺼리고 있어 수출전선에 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 정부는 수출환어음이나 기업어음 할인을 전담하는 펀드를 은행신탁과 투자신탁에 신설하는 방안을 강구키로 했다.

이와 함께 내년초에 있을 2조원 규모의 후순위채권 매입때 각 은행의 신용장 개설실적 등을 반영, 은행별 매입규모를 차등화할 계획이다.

그러나 수출업계에선 실질적으로 기업에 자금이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선 ▶사모사채 인수 ▶기업어음 할인 ▶환어음을 담보로 한 일반대출을 늘리는 등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9일 관계당국과 금융계에 따르면 은행들은 여전히 국제결제은행 (BIS) 자기자본비율을 맞추는데 급급한 실정이며 특히 외화부족은 내년초에도 이어질 것이라며 당분간은 신용장 네고를 억제한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계속되고 있는 수출입 업무의 파행 상태가 연말은 물론 내년초까지 이어질 것이란 비관적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내년 3월말 예정인 IMF의 은행경영 실사때도 심각한 금융경색이 나타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통상산업부 관계자는 "은행들이 환율 불안으로 BIS비율 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올해 환차손 규모를 제대로 추정하지 못함에 따라 연말까지는 대출을 최대한 조여 위험자산을 최소화한다는 자세" 라며 "당장은 수출입관련 금융이 풀릴 기미가 없다" 고 밝혔다.

실제로 통산부가 29일 각 시중은행을 상대로 실태를 파악한 결과 대다수 은행들은 자금사정이 여전히 어렵다며 신용장 매입을 기피하고 있으며 기존 심사방침을 바꾼 곳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30일 환율이 안정되면 그때가서 보자는 식이다.

수출환어음 매입기피 현상에 따른 대안으로 지난 4일부터 시작된 은행의 수출환어음 담보대출도 23일 현재까지 실적이 1천3백억원에 그쳐 한달 평균 수출환어음 매입수요 40억달러 (약 6조원)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지난 26일 임창열 (林昌烈)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이 은행장들에게 기업대출 지원을 강력히 촉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행 일선 창구에서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는 업계의 호소가 줄을 잇고 있다.

H사 관계자는 "정부가 금융계에 대해 아무리 수출환어음을 매입해 주라고 해도 은행은 요지부동" 이라며 "자금이 안돌면 생산을 줄여야 하고 결과적으로 내년도 수출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고 말했다.

한국무역협회 고광석 홍보실장은 "무역업계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금융기관이 매일 수출환어음매입실적과 수입 신용장개설 및 보증실적을 재경원과 통산부에 기업별로 구체적으로 보고토록 해 금융기관 구조조정시 BIS비율뿐만 아니라 이 실적을 근거로 은행경영실적을 반영토록 해야 한다" 고 말했다.

이재훈.고현곤.유권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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