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한국미술, 자부심 가져도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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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서도호씨가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해 호평받았던 ‘섬/원(SOME/ONE)’. 군번 인식표 수만개를 갑옷처럼 이은 이 작품을 밟으며 관객들은 집단 속 개개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서도호씨 제공]

“미술은 없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 영국의 저명한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1909∼2001)는 이제는 고전이 된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를 이렇게 시작했다. 선배들에 반해 끊임없이 새로움을 창조한 작가들의 역사가 곧 미술사라는 설명이다.

본지는 ‘김달진 미술연구소’와 함께 지난해 말부터 두 달간 한국미술을 대표할만한 30∼40대 미술가들을 조사했다. 미술시장이 어떻고, 새로 온 미술관장이 어떻고…. 미술을 둘러싼 각종 제도들이 관심을 받지만 미술은 결국 미술가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에서였다. 특히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형성해 앞으로의 활동이 더욱 기대되는 30∼40대의 젊은 작가들이 그 주역이라고 판단해서다. 큐레이터·미술평론가·교수 등 미술계 전문가 50명이 나서 10명의 미술가를 선정했다.

조각가 김주현(44), 사진가 노순택(38), 개념미술가 데비한(40), 한국화가 박병춘(43), 설치미술가 박윤영(41), 서양화가 박현수(42), 설치미술가 서도호(47)·양혜규(38)·이불(45),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40)씨(이상 가나다순). 예상 밖으로 장르·연령·성별 등에서 다양한 작가가 선정돼 한국미술의 풍부함을 보여줬다.

1월 29일 1면과 18면으로 이어진 기사를 시작으로 기자·평론가가 석 달간 열 명의 작가를 릴레이 인터뷰했다. 미술을 창조하는 미술가들의 창의력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이 화두를 가지고서다. 답은 몰입과 성실성. 한국말이 서툰 교포작가 데비한조차 자신의 작품에 관한 한 몇 시간이고 말했다. 한국화가 박병춘씨는 붓이 아니라 발로 그렸다. 현실과 동떨어진 산수화 속에서 음풍농월하지 않았다. 대신 버스가 지나가고, 낙하산이 내려오는 꼬불꼬불한 산골짜기를 직접 오르내리며 화폭에 살렸다. 이불씨는 성북동 산자락 작업실에서 고대와 현재, 역사와 미래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거대 서사를 다뤘다. 그는 “하루에 몇 시간 작업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뭔가를 하루에 몇 시간 사랑하느냐고 묻는가”라고 일축했다.

서도호씨 작업실에는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거쳐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돼 있는 ‘섬/원(Some/One)’의 원형이 놓여 있다. 미국 유학 시절 과제로 만든 작품이라고 했다. 그때그때 세간의 반응을 봐 가며 작업하는 게 아니다. 오래 전 구상했던 것을 10년 가까이 벼리며 실현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그들은 스스로에게 성실했다. 그 성실함의 그림자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홀로 씨름하는 외로움이다.

서울 안국동 옥탑집에서 작품을 구상하는 데비한은 “학연도 지연도 없는 교포가 한국에서 작가로 외롭게 활동하던 중 이번 인터뷰로 큰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서도호씨는 “기사를 통해 훌륭한 작품 세계를 가진 이들을 새로이 알게 됐다”며 “국내에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해외에서는 한국과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다. 우리는 더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전했다. 한국 미술의, 문화의 가능성을 확인한 기회였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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