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고분 발굴 의미와 파장…"발해는 고구려 후예"확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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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이번 발해 고분의 대규모 발굴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성과는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다량의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발해가 고구려 유민에 의해 건설된 국가임을 결정적으로 확인한 점. 물론 일제가 도굴한 1호왕릉과 지난 91년 발굴한 2호왕릉, 그리고 93년 연해주 지역에서의 절터등 간헐적인 발굴이 있었으나 이번처럼 대규모 고고학적 자료를 접하기는 처음. 주요 성과는 말갈의 흙무덤 양식과는 달리 3백23기 모두 석실 (石室).석곽 (石廓).석관 (石棺) 등 전통적인 고구려 무덤양식인 돌무덤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초장을 지낸 얼마후 이장하는 풍습인 면례 (緬禮) ▶3~10인을 함께 묻은 다인장 (多人葬) 풍습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설화에 따라 강에서 채취한 자갈을 무덤의 바닥에 깔았던 매장형식등도 확인됐다.

1천여기의 인골외에 금은 장신구.구리거울.도금 구리비녀와 구리꽃장식.은제 귀후비게 및 쪽집게.금띠 장식과 단추등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2천여종의 유물도 출토됐다.

이번 발굴에서는 또 당시 수도인 동경 (東京) 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다리와 인공호수터도 나왔다.

왕궁에서 약 5㎞ 후방에 15㎢의 인공호수, 다시 5㎞ 후방에 무단 (牧丹) 강을 건너는 2백m짜리 다리터, 그리고 서쪽으로 7~8㎞거리에 위치한 8기의 왕릉도 발견됐다.

발해 고분 발굴 사실은 국내학계에도 알려졌으나 발굴 내용이 알려지기는 처음. 영토문제의 민감성 때문에 중앙정부가 직접 관장할 정도로 보안이 엄격했기 때문이다.

거의 변화가 없다는 무덤의 발굴을 통해 발해의 국가성격이 밝혀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는 것이 국내 학계의 평가.

노태돈 교수 (서울대.한국사) 는 "다량으로 발굴된 자료는 발해를 건설한 고구려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내용을 보여주는 주요한 연구자료" 로 평가했다.

또 다리와 인공호수, 왕릉등의 발견에 대해 한규철 교수 (부산 경성대.한국사) 는 "지난해 중국에선 이것이 10대 유적발굴로 선정돼 상을 받기도 했다" 면서 "발해 수도의 규모와 생활상을 짐작케 한다" 고 설명했다.

내년에 발해 건국 1천3백년을 맞아 대규모 발해관련 학술행사를 준비중인 서길수 교수 (서경대.고구려연구소 이사장) 는 "발굴 결과와 관련해 내년 남.북한을 비롯, 중.일.러 사이에 논쟁이 야기될 것" 으로 전망했다.

이번 발굴 결과와 관계없이 중국 학계는 발해가 말갈에 의해 세워진 당의 속국이라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올 2월에 출간된 '고고 (考古)' (중국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刊)가 대표적인 예. 반면 소련은 연해주 서쪽 아무르강 지역에 수립한 말갈의 독립국이라 주장한다.

소련의 영토와는 겹치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가 짚힌다.

이들은 '신당서 (新唐書)' 에 기록된 대조영이 "속말 (粟末) 말갈 대조영" 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송화강 출신의 말갈이라 주장해왔다.

반면 일본 학계는 발해의 지배세력 = 고구려, 피지배세력 = 말갈이라는 견해를 펴고 있다.

국내에서도 대체로 이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교과서에도 그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당서 (舊唐書)' 의 "발해는 고구려의 별종" 이라는 기록이 그 근거. 그러나 말갈도 고구려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국사' (한길사刊)에 이같은 주장을 편 한규철 교수가 대표적. 북한은 80년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국이라고 발표해 중국과 갈등이 빚기도 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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