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와 4월에 간 ‘시대의 어른’ 김교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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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호 35면

영화 ‘그랜 토리노’는 빈티지 클래식 카 ‘그랜 토리노’를 아끼는 왕년의 한국전 참전용사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차를 훔치려 했던 몽족 청년 타오와 인연을 맺으면서 아시아인 이웃과 우정을 쌓는 이야기다. 라스트 신이 감동적이다. 이 노인은 타오를 괴롭히는 무리를 합법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 갱단의 총탄에 희생양이 된다. 공동체와 젊은 세대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코왈스키의 모습, 그것은 ‘어른’의 모습이다.

얼마 전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천주교 수장의 죽음이었지만 전 국민의 애도 속에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천주교 지도자로 머물지 않고 우리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어른’ 역할을 해준 분이었기에 그런 국민적 추모가 가능했다. TV로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줄곧 한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언론에 가끔 보도되는 몇몇 대형 교회 목사가 별세해도 국민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다.

개신교에 ‘어른’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때마침 계절은 4월. 4월에 와서 4월에 떠난 김교신(金敎臣)을 떠올린다. 1901년 4월에 태어나 해방을 넉 달 앞둔 45년 4월 마흔넷의 나이로 떠났으니 ‘어른’ 소리 들을 만큼 오래 산 것도 아니다. 한평생 고교 평교사를 지냈을 뿐이니 감투 좋아하는 우리 풍토에서 ‘어른’ 소리 들을 만한 지위에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조국애와 동포애를 일관되게 실천한 ‘참한국인’이었다.

김교신은 무엇보다도 ‘민족 정체성’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도쿄 유학 시절 ‘무교회주의’ 기독교 창시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 7년 동안 기독교 신앙을 배웠다. 무교회주의는 성서의 진리는 받아들이되 서양 기독교 교파인 장로교회니 감리교회니 하는 형식적인 제도를 무시한다. 이런 교회 제도들은 서양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한국·일본 기독교가 그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 김치 냄새 나는 기독교’를 만들겠다고 한 김교신의 말에는 ‘민족 기독교’에 대한 고민이 배어 있다.

김교신은 목사·장로 같은 교회 안의 직책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루터의 종교개혁 원리 중 하나인 ‘만인사제주의’에 근거를 둔 것이다. 당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김교신을 비난했다. 교회를 통하지 않은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기독교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김교신의 태도를 교회의 안정된 지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기회만 닿으면 그를 방해했다. 예컨대 김교신이 주도하는 성서강연회는 장소를 빌릴 수 없었다. 기독교청년회(YMCA)마저도 장소를 빌려 주지 않았다.

교회 측은 김교신이 일본인을 스승으로 모신 ‘친(親)일본적인’ 인물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천주교·개신교는 물론이고 민족주의를 표방하던 거의 모든 단체와 인사가 친일의 대열에 섰던 시절에 김교신과 동지들은 끝까지 민족 부활의 희망을 노래하다가 일제에 검거돼 극심한 고난을 겪었다. 김교신이 간행한 월간잡지 『성서조선』은 158호(42년 3월 1일)로 강제 폐간됐다. 김교신이 쓴 권두에세이 ‘조와(弔蝸: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의 마지막 문장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가 한국의 독립을 암시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김교신과 함석헌 등 무교회주의자 13명은 42년 3월 30일 전후 일본 경찰에 검거됐다. 후일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게 된 의사 장기려, 농학자 류달영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들은 만 1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재판도 받지 않은 채 감옥 생활을 하다가 43년 3월 29일 석방됐다. 300여 명의 『성서조선』 독자들도 거주지 관할 경찰서에서 열흘 넘게 경찰의 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었다.

이것을 ‘성서조선 사건’이라고 부른다. 당시 취조에 나선 일본 경찰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가운데서 가장 악질의 부류들이다. 결사니 조국이니 해 가면서 파뜩파뜩 뛰어다니는 것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100년 후, 아니 500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

연세대 서정민(교회사) 교수는 『성서조선』을 일컬어 “이 시기에 이만한 민족적 신앙 양심을 지키며 나온 간행물을 달리 찾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김교신, 그는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의 긍지와 자존심을 지켜낸 ‘시대의 어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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