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스캔들’ 미술품 복원가 맡은 김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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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순박한 웃음이 여전히 매력적인 김래원. 영화 마지막에 강준이 활짝 웃는 장면이 있는데, “세상을 다 얻은 자의 자신만만한 웃음”이라는 본인 설명과 달리 ‘김래원표 웃음’을 원하는 팬들을 위한 ‘보너스 샷’이란 느낌이다. [이영목 기자]

 서른을 눈 앞에 둔 배우 김래원(28)을 만나기 전, 내심 기대한 것은 “이 영화가 내 연기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 같다”라는 식의 답변이었다. 영화 ‘해바라기’, 드라마 ‘식객’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음에도 여전히 ‘옥탑방 고양이’(2003년 MBC)의 중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배우. 풋풋·순박·열정 같은 이미지에 고정되지 않고자 한다면 희대의 복제사기극을 펼치는 천재 복원가 이강준은 새로운 계기가 될 만했다.

정작 김래원은 “터닝포인트라기보다 테스트”라고 말했다. “30대에 어차피 하게 될 종류의 역할이잖아요. 너무 이르지 않나 고민스럽더라고요. 제 연륜이 못 따라갈 듯 싶고. 그래도 워낙 매력적인 시나리오인데다, 제작진을 믿고 선택했어요.”

◆미술계 명암 다룬 방대한 이야기=박희곤 감독의 데뷔작 ‘인사동 스캔들’은 조선시대 궁중화원 안견의 걸작 ‘벽안도’가 400년 만에 발견되면서 벌어지는 복제사기극을 다룬다. ‘벽안도’ 복원을 의뢰 받은 이강준과 인사동 큰손 배태진(엄정화 분)의 공모와 대립이 큰 축이다. ‘스캔들’이라는 말에서 읽히듯 핵심은 그림 복제와 고미술 밀거래 등 미술판의 어두운 이면. 거품 시비가 끊이지 않는 미술 시장과 잊을 만하면 터지는 작품 진위 논란을 감안하면 꽤나 그럴 듯한 얘깃거리다.

그러나 사설 경매와 일본 컬렉션, 중국·북한 미술 밀거래까지 넘나드는 이야기 구조가 방대해선지, 몰입하기가 쉽진 않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 등 이전까지 나왔던 두뇌사기극을 ‘복제’한 듯한 인상마저 있다. 그래도 후반부의 ‘퍼즐 맞추기’는 깔끔하게 떨어진다. 그때까지 기대감을 끌고 가는 게 김래원의 유들유들하면서도 댄디한 매력. “프랑스 유학파답게 지적이면서도 복제사기꾼의 이력을 가진, 알 듯 모를 듯한 나쁜 남자가 목표점”이었단다. ‘스마일’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트레이드 마크였던 순수 미소 대신, 적당한 야비함을 가미한 ‘술수(術數)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부터 김래원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는 박희곤 감독의 의도가, 막 변신을 모색한 김래원의 연기와 맞아떨어져 나온 성과다.

◆복제술에 동양화까지 수련=영화의 또 다른 포인트는 ‘선수’가 아니면 모를 복원·복제의 세계. 원본 그림에 덧댄 종이를 분리해 이본(異本)을 떠내는 ‘상박’, 오래된 고서를 물에 씻어 먹물을 빼내는 ‘세초’ 등이 마치 영화 ‘타짜’의 도박 기술처럼 소개된다. 김래원도 과천국립현대미술관의 복원실을 견학하고 기술을 사사 받는 등 캐릭터 이해에 공을 들였다. 미술학원을 8년간 운영한 어머니 덕에 회화의 기초는 알고 있었지만, 재능을 돈과 바꿔야 사는 ‘그림쟁이’의 세계는 이번에 깨쳤단다. “붓질을 익히기 위해 동양화를 배웠는데, 덕분에 요즘은 가로수를 봐도 가지의 뻗음과 음영이 보일 정도”라 했다.

얼마 전 데뷔 13년 만에 예능프로(MBC ‘무릎팍 도사’)에 처음 출연해 “사람들이 제 나이로 보지 않는다”는 고민을 털어놨던 그다. 인터뷰 내내 농담에도 좀처럼 웃지 않는 모습에 ‘진지한 래원씨’를 실감했다. 앞으로 연기 계획을 물었을 때도 느릿한 저음으로 답했다. “많은 분들이 여전히 ‘풋풋한 젊음’을 기대하시잖아요. 더 나이 들면 그런 역할 하고 싶어도 못 하니까, 할 수 있을 때까진 하려고요. ‘강준’에서 좀 더 나간, 섹시하거나 터프한 역할은 연륜이 쌓였을 때 하고 싶어요.”

‘젊음’의 아이콘에 발목 잡혀서가 아니라, 연기 인생을 길게 보고 하는 얘기이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겠다.

글=강혜란 기자
사진=이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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