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홀릭이 되살린 조선통신사 행렬

중앙일보

입력

11일 창경궁 명정전 앞에서 거행된 조선통신사 3사 임명식


지난 11일 서울 창경궁 명정전(明政殿) 앞에서 조선통신사 3사(使) 임명식 재현 행사가 열렸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 에도막부의 요청으로 조선 국왕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일본에 파견한 공식외교사절로 3사는 정사, 부사, 종사관으로 국왕이 임명한 사절단의 수장으로 국서를 일본에 전달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서울에서 (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주최로 3사 임명식이 열리던 그 시각 ‘워크홀릭’ 40여명은 경북 안동에서 걷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걷기연맹과 일본걷기협회가 공동으로 마련한 ‘21세기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에 참가한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지난 1일 서울 경복궁을 출발해 내달 20일 일본 도쿄에 도착할 예정이다. 200년만에 부활한 ‘21세기 조선통신사’들이다. 14일 그들을 따라 함께 걸어보았다.

14일 오전 경북 영천시 조양각을 출발하기 전 모습.


14일 오전 8시 경북 영천시 조양각 누각 앞에 중년을 넘긴 ‘건각’ 30여명이 모였다. 21세기에 다시 태어난 조선통신사들이다. 400년전에는 조선(한국)인로 구성되었지만 이번에는 일본인도 섞여있었다. 함께 걸으며 한·일간의 우정을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뒤쪽이 조선통신사 최고령자인 오가타 아키히로 씨.


‘걸어서 서울에서 도쿄까지’ 출발!
14일째 걷기가 시작되었다. 이날 걸어가야 할 길은 경주까지 39km. 50일간의 대장정 중 두 번재로 긴 거리다. 이들은 전날 가장 긴 41km를 걸었다. 하지만 이들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20여분을 지나 영천시내를 빠져나올 무렵 통신사 행렬 뒤쪽에서 걷던 남성 한명이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처음 출발 후 행렬의 걸음이 빨라지자 숨이 가쁜 모양이었다. 행렬 뒤를 따라오던 봉고차에 올라탔다.
오가타 아키히로 씨. 올해 79세로 이번 조선통신사 중 최고령자다. 농업교사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후 농사를 짓고있는 그는 폐암으로 절제수술을 받아 폐 절반이 없는 상태다. 차에 숨을 고른 그는 다시 행렬에 합류해 걷기 시작했다. 걷는 모습이 약간 기우뚱해 보였지만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경주까지 걸으며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두 번 정도 차에 다시 올랐지만 끝까지 뒤처지지 않고 완보했다. 그의 뒤에서 걷는 기자의 눈에는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방울이 맺혔다.

가운데 사람이 한국인 최고령인 임창선씨.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걷기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났을 무렵 행렬 가운데서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년의 재일교포 여성은 수첩에 적은 가사를 보며 ‘나의 살던 고향’을 입으로 음미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래는 중간중간 끊어졌다.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가사가 끊어지면 바로 남성의 소리가 흘러나왔고 노래는 중창을 바뀌었다.
임창선 씨. 올해 75세인 그는 한국인 조선통신사 중 최고령이다. 먼 길을 걸으면서도 열심히 노래까지 가르쳐주고 있었다.

오른쪽이 고양문 교수.


낮 12시 경주시 서면사무소가 있는 아하마을의 한 식당. 대장정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무래도 점심식사 시간이다. 이날 메뉴는 비빔밥. 각종 산채와 나물이 가득 담긴 대접에 고기를 넣고 볶은 고추장이 나와 먹음직스럽다. 사절단 대부분이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식사가 끝날 무렵 사절단 중 가장 날씬해 보이는 한국인 남성이 배낭에서 전자사전을 꺼내 일본인 사절단에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고양문 교수. 올해 65세인 그는 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하다 3년 전 명예퇴직했다. 20년 전 위암으로 수술까지 받았지만 건강한 모습이다. 산악회 회원으로 산에 열심히 오르내리다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 알림을 보고 행렬에 따라나섰다고 한다. 이렇게 장거리를 걷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경주 외곽에서 시내 방향으로 들어오는 조선통신사 행렬


오후 4시 50분 경주시내로 들어오는 형산강 서천교 부근. 햇볕은 사라지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열왕릉을 지난 조선통신사 행렬은 4번 국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은 거리는 1km 남짓. 38km를 걸어온 그들의 얼굴에 피로의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리를 건넌 행렬은 시내를 돌아 경주동헌 쪽으로 향했다.

경주동헌 뒷마당에서 펼쳐진 조선통신사 환영행사.


오후 5시 10분 30여명의 행렬단은 경주동헌 앞에 도착했다. 동헌 입구에서 농악대가 이들을 맞았다. 농악대와 함께 동헌 안으로 들어온 조선사절단 일행은 흥겨운 농악 소리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동헌 뒤뜰 은행나무 아래서는 한바탕 놀이마당이 펼쳐졌다. 조선통신사들의 얼굴에는 처음 출발할 때와 같이 다시 미소가 흘렀다.

왼쪽부터 선상규 총재, 고바야시 전무, 배위환 부사.


소요시간 총 8시간 10분. 조선통신사의 50일간 대장정 중 14일째 장정은 이렇게 끝났다. 서울서 도쿄까지 바닷길을 빼고 걸어서 가야하는 길은 총 1145km. 이들은 지난 14일간 422km를 걸었다. 남은 거리는 723km. 그들의 앞길이 탄탄대로이기를 두손 모아 빌어본다.

글·사진/워크홀릭 노태운 기자 noht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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