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대선]숨막힌 개표드라마 한나라당…한때 앞서다 반전, 충격 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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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천당과 지옥을 수시로 오가다 자정을 넘기면서 지옥으로 다가서자 당은 충격과 짙은 허탈감에 휩싸였다.

이회창후보가 2% 정도 앞서갈때 당사를 가득 채웠던 환호와 웃음소리는 패배가 가까워오면서 침묵과 탄식으로 변해갔다. 당직자들은 자정이 가까워오면서 거의 당사를 떠났다.

10층에 마련된 상황실에는 선대위원장이나 고위 당직자들이 사라진 채 김명윤 (金命潤) 고문과 일부 의원.요원들만 자리를 지켰다.

큰소리로 말을 꺼내는 이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TV만 지켜봤다. 이들은 자체조사 결과 李후보가 1.1% 차이로 이기는 것으로 나타났고 개표 초반 1.5%까지 앞섰던 터라 반전 (反轉) 의 충격이 더욱 큰 듯했다.

박희태 (朴熺太) 홍보본부장은 특유의 유머도 잃어버린 채 "92년엔 이 시각에 김영삼후보의 승리가 확정돼 모두 기뻐했는데…" 라고 입을 닫았다.

李후보가 앞서갈 때만해도 웃음꽃이 폈던 최병렬 (崔秉烈) 기획위원장 방은 문이 꽉 닫혔다.

崔위원장은 TV를 끈 채 비서관과 무슨 작업을 했다.

김영일 (金榮馹).변정일 (邊精一).황우려 (黃祐呂) 의원 등 李후보 최측근 의원들은 깊은 충격에 휩싸였다.

개표가 반쯤 진행된 때 李후보가 15만표 정도로 밀리자 金의원은 "끝난 것 같다. 이 추세를 뒤집을 수는 없지 않은가" 라고 말했다.

李후보가 앞설 때만 해도 당에는 TK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崔위원장 방에 모인 정구영 (鄭銶永) 전검찰총장 등 전직 고위 인사들은 대구에서 지지율이 치솟자 "역시 TK는 화끈하다. 그런데 PK는 미적지근해" 라는 촌평을 주고받았다.

TK에 대한 기대는 김윤환 (金潤煥) 선대위의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엎치락 뒤치락할 때도 "월드컵 도쿄 (東京) 대회에서 처럼 극적인 반전을 할 것" 이라고 자신했다. 金의장은 계파의원들에게 "경북은 예상대로고 대구는 예상보다 더 표가 나오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1%, 표로는 약 30만표차로 이길 것 같다" 고 전망했다. 그러나 李후보가 역전 당하면서 표차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그는 조용히 집으로 향했다.

피를 말리는 상황은 오후6시 정각을 기해 MBC가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李후보가 김대중후보에게 1%포인트 뒤지는 것으로 나오자 한나라당 상황실은 깊은 침묵에 빠져드는 모습이었다.

이회창후보는 당사에서 당직자들이 TV앞에 모여 앉아 손에 땀을 쥐고 있는 사이 극도의 불안감 속에 극소수의 당직자와 함께 롯데호텔에서 초조히 TV를 지켜봤다.

이에 앞서 오후6시30분 시내 음식점에서 가진 조순 (趙淳) 총재 내외와의 만찬 도중 李후보는 "MBC출구조사는 1%포인트 김대중후보에게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다른 방송국 출구조사결과는 金후보에게 0.1%포인트차로 앞서 있다" 는 얘기를 측근으로부터 전달받았다. 하지만 李후보는 "너무 걱정말라" 며 趙총재 내외에게 미소를 지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호텔에 머무르면서도 당과는 수시로 연락을 취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느낌도 전달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에 앞서 오전6시35분 부인 한인옥 (韓仁玉) 씨와 함께 평창동 민족문화추진회 빌딩 1층에 마련된 구기동 제3투표구에서 한표를 행사했다.

李후보는 "소감이 어떠냐" 는 취재진의 질문에 "덤덤하다" 고 짧게 답했다. 韓씨는 환한 표정을 지었지만 李후보는 다소 긴장된 표정이었다.

김현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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