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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의 이야기가 있는 식탁] 소설가 신경숙씨와 삼청동 수제비 집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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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오후 가끔 비가 내리겠다는 일기예보가 있던 날, '삼청동 수제비'집에서 소설가 신경숙을 만났다. 펄펄 끓는 커다란 장국솥에 둘러선 아주머니들이 수제비를 뜯어놓고 손님이 주문한 수제비가 항아리에 담겨 식탁들로 옮겨지느라 가게 안은 분주살스러웠다. 지금은 커다란 주방을 사이에 둔 채 양 옆의 가게를 넓게 틔운,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 되었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동네 사람들이나 찾던 작은 가게였단다.

20여년 전, 같이 살던 오빠 내외로부터 독립한 그가 여동생과 단출한 살림살이를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 삼청동이었다. 그 사이 번잡한 서울 속에서 외따로 떨어진 듯 조용하던 이곳까지 변화의 바람은 불어왔다. 그래도 총리 공관 담장과 이웃한 흰 칠의 2층짜리 건물은 그 바람을 피해갔다. 2층의 창문 두 개가 2차선 도로를 향해 나 있는데 그곳이 한때 그가 살던 방이다. 방에 누우면 도로를 달려가던 자동차들 소리가 그대로 귓속으로 흘러드는 시끄러운 방이었다. 지금은 누가 사는지 두 개의 창은 커튼도 쳐지지 않은 채 닫혀 있다.

아직은 눈과 발에 선 동네를 기웃거릴 때마다 수제비집 앞을 지나고는 했다. 가게문 너머로 달랑 둘 놓인 작은 탁자가 들여다보이는 작은 가게였다. 언제 비가 내리면 한번 들어가봐야지 하던 것이 차일피일 미뤄졌다.

전쟁 세대였던 아버지는 '밀가리' 음식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게다가 수제비는 생각 외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어서 정읍의 고향집에서는 수제비를 만든 적이 없었다. 가끔 옆집에서 얻어먹는 수제비 맛이 달았다. 저녁에 끓여 먹고 남은 수제비가 밤 사이 냄비 안에서 국물 없이 퉁퉁 불면 그때 먹는 맛도 별미였다.

딸들을 보러 어머니가 상경했다. 맛있는 것을 찾아 동네를 헤매다 들어간 곳이 비가 오면 가봐야지 했던 그 수제비집이었다. 목조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탁자가 네 개 놓인 좁은 2층이 있었다. 수제비를 배불리 먹었다. 그제서야 어머니도 수제비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속풀이 음식으로 수제비가 그만이라고 했다. 그 후로 가끔 어머니가 딸들을 보러 올 때마다 수제비집에 들르게 되었다. 정읍에서도 이따금 수제비 가게를 가보지만 어째 이 맛이 아니라고 했다.

동생이 결혼을 하고 그도 삼청동을 떠났다. 1년에 한 번 서울에 흩어 사는 자식들을 보러 부모님이 올라온다. 그때마다 수제비를 먹고 싶다는 어머니와 오랜 만에 올라왔는데 밀가루 음식으로 되겠냐며 다른 곳으로 가자는 아버지 측으로 패가 갈린다.

20년 동안 수제비집도 소문을 탔다. 손님들이 넘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할 때가 많아졌다. 먼 데서 차까지 타고 와 수제비를 먹는 것도 마땅찮은데 한참 기다리기까지 한다고 남자 형제들은 투덜거리지만 그와 여동생, 어머니는 그 기다림까지 즐거움이다.

항아리 가득 내오는 수제비는 20여년의 세월에도 변함이 없다. 이곳의 수제비는 양념을 곁들여야 제맛이 난다. 풋고추를 송송 썰어 간장에 절인 양념을 넣으면 수제비 국물 맛에 금방 풋고추 향이 감돈다. 수제비와 함께 아삭아삭한 풋고추가 씹힌다. 초여름이면 애호박에서 단맛이 난다. 감자는 포슬포슬하다. 장국이 끓으면서 밀가루와 감자의 전분이 풀려 국물은 걸쭉하다. 애호박과 감자, 밀가루가 제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함께 조화를 이룬다. 수제비는 여름 음식이다. 예전에는 칠석이 지난 후부터는 밀가루 음식을 즐기지 않았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밀 특유의 냄새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비까지 시원스레 내려주면 좋을 텐데 감감무소식이다.

그는 수제비를 먹으면서도 가게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이곳에 들를 때마다 그는 삐걱거리던 나무 계단이 놓였던 자리를 더듬는다. 20여년 전 스무살 앳된 그가 나무 계단을 오른다.

오랜만에 삼청동 길을 걸어보았다. 400년이나 되었다는 돌계단을 올라간다. 누군가 커다란 암석을 쪼아 계단을 만들었다.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인공 계단을 잇대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숨을 몰아쉬며 돌아보니 저 아래로 삼청동 길이 내려다보인다. 그가 살았던 집도 보인다. 그가 그 창에 달아놓았을 꽃무늬 커튼 자락이 팔락 보였던 듯도 싶다.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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