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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의 서핑차이나] 5세대 지도자 시진핑(習近平) Part 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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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중국을 방문한 휴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는 시진핑 국가부주석

◇군대의 여가수와 만남에서 결혼까지
1986년 말 시진핑은 ‘이립(而立, 30세)’의 나이가 됐다. 관직 계급도 한 단계 올랐다. 샤먼(厦門)시 상무부시장이 됐지만 아직 미혼이었다. ‘국가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는 일만을 생각하는 정계의 샛별이었지만, 혼자 살기에는 정이 부족함을 느꼈다.
마침 당시에 그에게 적극적으로 결혼을 권한 사람이 있었다. 시진핑에게 당시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던 군대의 여가수 펑리위안(彭麗媛)을 소개해줬다.
펑리위안은 시진핑보다 9살 어리다. 산둥(山東)성 시골의 보통 농가의 딸이었다. 하지만 천부의 목소리를 타고나 15살에 산둥예술학원 중등전문부에 선발돼 성악을 배웠다. 1980년 열여덟 살에 산둥TV 방송국에 추천 받아 베이징서 개최된 전국가요콩쿠르에 참가해 보기 좋게 입선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문공단(文工團, 중국에서 공산당 지도방침을 기초로 가요·무용·연극 등의 문예활동을 통해 선전활동에 종사하는 종합적 문예단체)에 띄어 같은 해 군에 입대해 군부대 여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펑리위안은 총명했다. 보다 높은 학력을 희망했다. 그 후 그녀는 중국음악학원 성악부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저명한 성악교사인 진톄린(金鐵霖)의 가르침을 받으며 대학본과와 대학원서 공부했다. 민족성악석사학위도 받았다.
진톄린은 가수양성의 명수로 알려져있다. 일찌기 ‘민족가수’로 중국대륙을 풍미한 저명한 여가수 리꾸이(李谷一)의 최초의 교사이자 첫 남편이었다. 리꾸이는 명성을 얻은 후 진톄린과 헤어져 전 해군사령원 샤오진광(蕭勁光)의 아들 샤오쭤넝(蕭卓能)과 재혼했다.
진톄린은 펑리위안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녀의 선천적인 목소리를 미성창법으로 연마시켰다. 노래 소리를 한층 더 달콤하게 지도했다. 펑리위안은 ‘희망의 전야에서(在希望的田野上)’란 노래 한 곡으로 중국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게 됐다.
친구가 시진핑에게 펑리위안을 소개할 즈음 펑리위안은 아직 한창 청춘이었다. 게다가 군부에서 가수로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할 때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시진핑이 샤먼에서 근무한다는 말을 듣고 ‘떨어져 사는 것은 안된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본래 만남 자체도 그만두려 했지만 친구가 시진핑이 ‘빼어나게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찬해 일단 얼굴이라도 보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당일 펑리위안은 친구 집에 일부로 따뜻한 군용 바지를 입고 갔다. 그녀는 시진핑이 겉모습을 중시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려 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순간 펑리위안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시진핑이 언뜻 보기에 시골 사람같이 보였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꽤 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한마디에 그녀는 생각을 바꿨다.
시진핑은 “요즘 유행하는 노래가 뭐죠?”라던가 “출연료는 얼마죠?”라는 것들을 묻지 않고, 처음부터 “성악에는 노래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나요?”라고 물었다.
펑리위안이 대답하자, 다시 “미안한데 내가 TV를 안 봐서 모르는데 당신은 요즘 어떤 노래를 부르나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희망의 전야에서’를 불러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시진핑은 “네! 그 노래는 들어본 적이 있어요. 아주 좋아요”라고 맞장구 쳤다.
그렇게 첫 만남부터 마음이 통한 것이다. 여자 친구가 계단아래서 펑리위안을 불러도 그녀는 아래로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을 뿐만 아니라 다음에 다시 만날 약속까지 주고받았다. 펑리위안은 다음과 같이 당시를 술회한다.
“그 때 나는 흔들렸어요. ‘이 사람이 내가 기다리던 사람일까? 순수하고 생각도 깊은데’ 후에 그가 나에게 ‘만난 지 40분도 안돼 나는 당신이 내 아내가 될 사람으로 결정했다’고 말했어요”
두 번째 만남에서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둘의 마음은 한층 더 서로에게 빠져들어갔다. 그는 펑리위안의 구애와, 순박하고 선량함에 마음을 뺏겼고, 그녀는 시진핑의 깊은 마음씨와 성실함, 인내심, 특히 그의 업무에 대한 열정에 호감을 갖게 됐다.
시진핑은 그녀에게 “나는 행정을 담당하고 있어, 하루에 10시간 이상 집안 일을 챙길 수 없을 지 모른다”라고 정직하게 말했다. 펑리위안은 “공무를 잘 해내지 못하면 집안 일도 할 수 없다. 양쪽 모두 소중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둘은 역사, 현재, 중국, 해외, 추구하는 것 등 여러 가지 공통의 관심사를 이야기했다. 헤어질 무렵 그는 “우리는 똑같이 애쓰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천성이 순진하고 선량하다. 또 만나고 싶은데…”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마음은 곧 하나가 됐다. 서로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펑리위안의 부모는 딸의 상대가 고급간부의 아들, 게다가 시중쉰의 아들이란 것을 알고는 만남을 동의하지 않았다.
시중쉰 부부는 슬하에 다섯 아이가 있었다. 그 중 아들은 시진핑과 시위안핑(習遠平)이다. 시위안핑은 당시 동생으로 어렸기 때문에 당시 광둥성 제1서기에 취임한 양친과 함께 광저우에 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용생구자(龍生九子, ‘龍生九子 各有所好’라는 성어로, ‘용이 아홉 아이를 나았지만 모두 각각이다’라는 의미로 부모가 같더라도 아이들은 모두 다르다는 뜻)’라는 말이 있다. 시위안핑은 주위에서 ‘도련님’ 대접을 받았고 특히 여성문제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펑리위안 부모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펑리위안은 후에 “부모님들은 딸이 고급간부의 아들과 결혼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양친은 고급간부의 아들 가운데 ‘도련님’이 많고, 게다가 허황된 꿈을 꾸고 싶지 않아 하셨다. 게다가 딸에게 힘든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진핑은 그녀에게 “내 아버지는 농민의 자식이든 아니든 누구던지 상관없어 하신다. 우리 집 형제들은 모두 평민의 자식들과 결혼했다. 게다가 내 가족들이 우리와 평생 같이 사는 것도 아니다. 내가 당신의 부모님들께 확실히 설명하면 꼭 허락하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진핑과 펑리위안(사진출처: http://cq.health.qq.com/a/20080729/000505.htm)

◇부인은 노래로 군 소장에, 남편은 중국 정계의 샛별로
시진핑은 결혼이란 암초를 만나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1987년9월1일 서둘러 식을 올렸다. 결혼 사진 촬영도, 결혼 등기증 제출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당시 시장에게 결혼보고로 ‘밤 7시 집합, 식사’라는 초대장을 보냈고, 결혼 수속을 단 하루 만에 모두 끝냈다.
두 사람은 결혼 후에도 함께 지내기 보다 헤어져 지낸 시간이 더 길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매우 돈독했다. 이는 당나라 시인 진관(秦觀)의 시 작교선(鵲橋仙)에 나오는 “두 사람의 정이 영원하기만 하다면, 어찌 아침 저녁으로 만나길 더 구하랴(兩情若在長久時, 又豈在朝朝暮暮)”라는 구절과 일맥 상통했다. 펑리위안이 어느 날 홍콩에서 열린 해방군 예술단 공연 ‘향강명월(香江明月)의 밤-중추절 종합 연예의 밤’에 참가했다. 펑리위안은 홍콩에서 브랜드 옷가지와 화장품을 사는 대신 지방에서 일하는 시진핑을 위해 당시 홍콩에서 평판이 좋던 컵라면 한 상자를 사 보냈다.(이는 이유가 있다. 펑리위안이 시진핑 숙소를 방문했을 때 보좌관은 시진핑이 컵라면을 너무 먹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당시 일을 마치고 늦게 돌아오는 일이 잦았는데 이미 닫힌 식당을 열게 하기가 껄끄러워 스스로 사두었던 중국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자주 있었다. 당시 컵라면은 맛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 놓은 지 오래돼 곰팡이가 생긴 경우도 많았다. 건강에 안 좋은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래서 펑리위안은 홍콩에 간 기회를 이용해 평판이 좋은 상표의 컵라면을 사 보낸 것이다)
두 사람 사이는 긴밀했지만 시진핑은 스스로를 엄격히 규율했다. 펑리위안을 만나러 갈 때에도 외부에 전혀 표시내지 않았다. 부인 동반이 가능한 장소에도 ‘하루 종일 아내를 따르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듣겠는가. 나쁜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동반하지 않았다. 시진핑은 게다가 펑리위안에게도 엄격함을 요구했다. “나는 당원간부이기 때문에 당신은 결코 조직에서 주최하는 것 이외의 공연에 절대 참가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펑리위안도 이를 엄수하겠다고 말했다.
필자는 이와 관련해 잘 아는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시진핑이 저장성 당서기를 맡고 있을 때, 펑리위안이 군부대 선전활동의 일환인 어떤 공연에 참가하고 있었다. 폐막 후에 주최측에서 기념촬영을 하지 않겠다고 조건으로 펑리위안을 위로연에 초대했다. 펑리위안은 참가하려다가 먼저 시진핑에게 이야기를 했다. 시진핑은 보좌관에게 내빈들을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 조사 결과 내빈 가운데 여러 명의 저장성 출신 상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진핑은 이용당했다는 풍문이 돌 것을 염려해 펑리위안에게 참석하지 말도록 했다.”
이렇듯 시진핑의 마음 씀씀이는 깊고, 장래를 위해 명예를 소중히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펑리위안은 소장으로 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부인은 노래로 소장 계급장을 달았고, 남편은 중국공산당 정계에서 가장 빛나는 샛별이 됐다. 중국의 장래를 담당할 ‘왕’으로 빛나고 있다고 말하기에 손색이 없다.
시진핑과 펑리위안은 슬하에 딸이 한 명 있다. 이름은 시밍쩌(習明澤)로 어릴적 이름은 무쯔(木子)였다. 현재 항저우 외국어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평안저장(平安浙江)’, ‘법치저장(法治浙江)’, ‘녹색저장(綠色浙江)’의 실적을 쌓다
2002년10월 제16회 당대회가 소집됐다. 당시 한 중앙정치국상무위원이 10년 전 후진타오와 같이 아직 쉰 살이 안된 리커창과 시진핑 중 한 명을 16기 중앙정치국상무위원에 발탁해 중점적으로 테스트하자고 주장했다. 제5세대 지도자를 새롭게 중앙정치국상무위원에 발탁하느냐 마냐의 문제가 토의 안건에 오른 것이다. 정치국상무위원 다수는 제14차 당대회의 선례를 따라 50세 이하의 동지 한 명을 상무위원 그룹에 넣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장쩌민이 이 의견에 반대했다. “현재 50세 이하의 동지는 아직 연공을 많이 쌓지 않았다. 장래에 보다 큰 정치적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그들이 여러 곳에서 활동시켜 단련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했다. 그들을 정치국이나 서기처 혹은 국무원, 그리고 주요 성시에서 적당한 직무를 맡기자고 제안한 것이다.
중앙정치국상무위원회는 장쩌민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16차 당대회가 끝나자 시진핑을 저장성 당서기로 임명했다. 2004년 원자바오의 제안을 받아 리커창은 랴오닝성 당서기에 임명해 동북진흥이란 중책을 담당케 했다.
확실히 중남해 최고층의 의지를 받들어 2002년10월에 시진핑은 저장성 성장에 임명됐다. 한 달 후에 그는 저장성 당서기에 선출됐다.
저장성은 경제대성으로 GDP 전국 4위로 광둥, 산둥, 장쑤성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 시진핑의 앞 길은 보다 넓은 탄탄대로로 접어들었다.
시진핑은 저장성에 전임된 후 9개월 동안 전성의 90개 현·시 중에서 69개 현·시를 시찰했다. 저장성 경제의 급속한 발전을 주도하는 민영경제의 호조에 발맞춰, 민영경제가 저장성 경제의 엔진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저장성이 한층 더 발전하기 위해서 ‘저장성은 적극적으로 외자를 도입하고, 각 산업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저장성 기업가들의 국제시장 진출을 외국 상인들이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어 저장성을 장강델타에 연결시켜 상하이·장쑤성과 장강델타 경제 일체화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성공하면 ‘상하이·장쑤·저장 세 성의 자원공유가 촉진되어 호리호혜의 공동 발전이 가능해 져 세계적인 도시 벨트 건설을 촉진할 수 있다”고 구상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저장성 100명 이상의 시·지구 위원회 서기들과 지방 청장과 국장들을 인솔해 상하이와 장쑤성을 시찰해 그곳의 경험을 배우고 협력사항에 대해 협의했다.
또한 시진핑은 후진타오가 제기한 조화사회와 과학적 발전관 사상에 기반해 ‘평안저장’, ‘법치저장’, ‘녹색저장’이라는 통치이념을 주장했다.
이후 저장성은 연평균 14%정도의 성장을 계속했다. 시진핑은 큰 개혁과 특필할만한 정치적 성과는 없지만 시세를 타고 정치를 움직이는 적극적인 실무가로서 지도자의 풍격을 엿보였다.
시진핑은 저장성에서 업무를 하는 동안, 투서와 불만제기를 중시했다. 그 중에서 주목할 점은 ‘광이고지(廣而告之, 널리 전한다는 의미 광고는 이 말의 약칭)’ 즉 널리 전하는 것을 강조했다. 지도자가 시찰에 나설 때 신문과 텔레비전 등 미디어를 통해 투서와 불만 수리 부서에 예고해 대중들의 불만 제기를 미리 예약 받았다.
물론 그의 업적이 칭찬 일변도는 아니었다. 예를 들면 2003년 홍콩 ‘태양보’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게재했다.
‘베이징 사스 사건’ 당시 후진타오 원자바오 정권은 멍쉐넝(孟學農)을 해임하고 왕치산(王岐山)을 베이징 시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번 미윈등회(密雲燈會, 2004년2월 베이징시 미윈현에서 발생한 정월대보름 등회에서 대중이 몰려 37명이 압사한 사건)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누가 책임을 졌는가? 저장성의 화재(2004년4월 발생해 40여명의 사상자를 낸 저장성 대화재)는 누구의 책임인가? 시진핑 저장성 당서기에게 책임은 없나? 뤼쭈산(呂祖善) 저장성장은 책임이 없나? 현재까지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린성 훙후(洪虎) 성장은 지린성의 사고에 관해 “나는 성장으로 안전한 생산공작의 제일 책임자로 활동 실패에 대해 중요한 지도책임을 져야 한다. 일반 인민들과 죽고 다친 대중들에 대한 깊은 반성과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된다”는 발언을 공개한 바 있다…….”

이어
[중국 최고 지도자 해부] ‘샛별’ 중국 5세대 지도자 시진핑(習近平) Part Ⅳ
◇천량위(陳良宇) 오직사건으로 흔들리는 상하이에 전임되다
◇‘천량위 일파 비판’, ‘충성을 선서하고 임관’ 처치
◇‘황제는 돌고 도는 것 내년은 내 차례?’
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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