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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유래]송파구 삼전동…행인많던 '삼밭나루' 서 유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서울송파구삼전동 (三田洞) 의 동명은 이곳에 행인이 가장 많이 드나들던 경강삼진 (京江三津) 중의 하나였던 '삼밭나루' 가 있었던데서 유래된 것으로 한자식 표현인 삼전도 (三田渡)에서 따온 것이다.

이 '三田' 역시 이곳에 삼 (麻) 을 키우던 밭이 있었던데서 '麻' 가 소리값이 같은 '三' 으로 바뀌었다는게 정설이다.

하지만 이곳이 원래 포구로서 다른 곳에는 조수가 밀려 올라왔으나 이 마을중 세 곳만은 물이 차지않아 밭을 일궜다는데서 밭이 세군데 있다는 뜻으로 '三田' 이라 했다는 이설 (異說) 도 있다.

이곳은 조선때 경기도광주군중대면 (中垈面)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삼전리가 됐다.

지난 63년 서울시로 편입돼 성동구삼전동이 됐다가 강남구 (75년).강동구 (79년) 를 거쳐 88년 송파구에 소속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 삼밭나루가 처음 튼 것은 세종21년 (1439) 으로 도성에서 30리밖에 있는 태종의 헌릉 (獻陵)에 참배키 위한 능행로 (陵行路) 로 개발됐다.

이후 세종의 여주 영릉 (英陵) , 성종의 선릉 (宣陵) 이 강남에 생기면서 중종31년 (1536)에는 이곳에 부교 (浮橋)가 놓이기도 할 정도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인조 14년 (1636) 병자호란때 청군에 패한 인조가 이곳에 9층의 수항단 (受降壇) 을 쌓고 청태종에게 '삼배구고 (三拜九叩 : 세번 절하고 이마를 아홉번 땅에 대는 복종의 예)' 를 한 굴욕의 현장이 되는 비운을 겪었다.

특히 호란이 끝난 3년뒤에는 청의 끈질긴 요구로 이곳에 우리가 그냥 삼전도비 (사적 제101호.사진) 라 부르는 '청태종공덕비 (일명 汗의 비)' 까지 세워지기도 했다.

이 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 (높이 4.6m, 폭 1.5m, 두께 0.4m) 로 '평화를 파괴한 것이 조선측이며 남한산성에서 봄어름 밟듯 두려움에 떨고 있던 인조를 청태종이 죽이지않고 덕을 펴 그 덕으로 꿩처럼 흩어졌던 백성이 모여들어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찬 뿌리에 다시 봄이 오는 것같다' 는 내용의 비문이 적혀 있다.

내용은 백헌 (白軒) 이경석 (李景奭) 이 짓고 글씨는 한성판윤 오준 (吳埈) 이 썼는데 특히 吳는 벼슬을 버린뒤 절필 (絶筆) 은 물론 오른손을 돌로 짓이겨 스스로 병신이 되었을 정도로 비건립에 관계된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청일전쟁직후인 고종32년 (1895) 같은 이유로 강물에 던져졌던 이 비는 1913년 일제가 우리를 폄하시키기 위해 다시 제자리에 세워졌다가 광복과 더불어 그 해 다시 땅속에 묻히는 곡절을 겪었다.

그후 63년 당시 문교부에 의해 '치욕의 역사도 교훈' 이라며 꺼내져 원래보다 동남쪽인 지금의 석촌동에 보존되고 있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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