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오른 해적 “미국인 잡아서 보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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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 달라졌다.” 미 해군이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억류됐던 머스크 앨라배마호의 리처드 필립스 선장을 구출한 다음 날(13일) AP통신은 이렇게 보도했다.

그동안 소말리아 해적의 일처리 방식은 ‘순진’했다. 배를 납치한 뒤 해안가로 끌어가 숨기고, 선주들이 몸값을 지불할 때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돈만 내면 배와 선원들을 안전하게 풀어줬다. 납치 과정에서 허공이나 선체에 총을 쏘기도 했지만, 실제로 선원의 생명을 해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변하고 있다. 미국은 몸값 협상 대신 정면대결을 택했다. 12일 전격적인 군사작전을 펼쳐 해적 3명을 사살하고 1명을 체포했다. 이틀 전에는 프랑스 해군이 2명을 사살하고 3명을 체포했다.


그러자 해적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프랑스·미국에 대한 보복”을 다짐하며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 구출작전 이후 소말리아 해적은 그리스 화물선 M V 아이리니호 등 4척의 선박을 잇따라 납치했다.

미국 네이비실(SEAL) 대원들이 낙하산 훈련을 위해 UH-60L 블랙호크 헬기에서 뛰어내리고 있다. 미 해군은 12일 실 대원들이 리처드 필립스 선장 구출 작전에 성공한 뒤 이 사진을 공개했다. 훈련 장소와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실 대원들은 극한 상황에 대비해 평소 심해 잠수 등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남은 인질들 생명 위험”=선원들을 위해 스스로 인질이 됐다 구출된 필립스 선장과 그를 구한 미 해군은 이번 사건으로 영웅이 됐다. 군 통수권자로서 민첩하게 대응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인기도 치솟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분위기는 달랐다. AFP에 따르면 소말리아에는 아직도 세계 각국의 배 13척과 228명의 선원이 억류돼 있다. 해적들과 인질협상을 하고 있는 국가들은 협상에 악영향을 미칠까 걱정이다. 인질 가족들의 반응은 좀 더 직설적이다.

“풀려난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은 뭔가? 해적들이 그들을 상대로 화풀이를 할 수도 있다.”

지난해 10월 동료 22명과 함께 납치된 필리핀 선원의 부인 빌마 데 구즈만은 이렇게 걱정했다.

말레이시아에 있는 국제해사국(IMB)도 “미국·프랑스의 대응은 적절했다”면서도 해적들의 보복을 우려했다. 필립스 선장 구출 작전을 지휘한 윌리엄 고트니 미 해군 중장조차 “(이번 작전으로) 지역 내 폭력 사태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선박 무장론 논란=소말리아 해적들은 앞다퉈 ‘복수’를 다짐하고 있다. 머스크 앨라배마호를 납치했던 해적단 두목인 아브디 가라드는 13일 AFP통신과의 전화 통화에서 “몸값을 안 받고 인질을 풀어주기로 했는데도 거짓말쟁이 미국인들이 우리 동료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앞으로 우리 바다를 지나가는 미국 시민들을 끝까지 따라가 잡을 것”이라며 "자비를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 소말리아 중부에서 활동하는 해적 압둘라히 아흐메드도 “미국인이나 프랑스인을 잡게 되면 살려두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CNN은 전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 “자위를 위해 민간 선박의 무장을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선주들의 반응은 아직 부정적이다. “무기를 싣고 다닐 경우 거꾸로 무기를 노린 해적들의 표적이 될 수 있고, 실제 상황에선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선원들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소말리아·미국, 해적 대책 공조=필립스 선장이 구출된 후 수시간 뒤, 도널드 페인 미국 하원의원은 소말리아 대통령·총리 등을 만나 해적 관련 대책을 논의했다. 미 하원 아프리카 담당 외교소위 위원장인 페인은 회담 뒤 “소말리아 정부는 미국과 함께 일하길 원하고 있다”며 “앞으로 2~3주 내에 자체적인 해적 소탕 방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날 소말리아를 떠나 케냐로 가는 길에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이슬람 무장반군 조직인 알사바브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알사바브는 해적과는 무관하며, 알카에다와 연계된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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