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해외 칼럼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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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미국과 러시아가 최근 전략무기 감축 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지구촌 핵무기 폐기에 대한 희망이 되살아났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핵 폐기는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주의자들뿐 아니라 정치인과 학자들도 요즘 핵 폐기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냉전 시절엔 전쟁 억지 수단으로서 핵무기의 필요성이 정당화됐다. ‘상호확증파괴(MAD)’ 체제 하에서 일단 터지면 모두 죽는다는 ‘공포의 균형’ 위에 안보가 확립됐다. 그 당시 양극화된 세계에서 핵무기 보유국은 5개뿐이었다. 이들 모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판도가 변했다. 바르샤바조약기구는 해체됐고, 소련도 붕괴됐다. 양극화된 세계와 동서 간 분열은 사라졌다. 하지만 상호 억지라는 위험한 논리에 기반한 질서는 협력과 상호 의존에 의한 새로운 시스템으로 교체되지 않았다.

요즘 분쟁이 한창인 나라들도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이 그들이다. 이란과 북한 역시 이미 핵무기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 이들이 반드시 이성적이라 할 수 없는 국가에 핵무기를 확산시킬 위험성도 있다. 테러단체들이 핵무기를 입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핵 확산 방지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작동시키려면 주요 핵 보유국, 특히 미국과 러시아가 핵 폐기를 향한 조치를 시급히 취할 때 가능하다. 두 나라는 거의 2만50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세계 핵무기의 96%에 달한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이러한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은 희망적이다. 미국의 새 행정부가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는 과학자들과 정치인들에 대해 귀를 막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다행스럽다. 실제로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목표는 미국 새 정부의 무기 통제 관련 어젠다에 포함돼 있다. 이와 함께 영국·프랑스·독일의 제안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러시아도 최근 핵무장 해제에 착수할 준비가 돼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간 반대파들은 효과적인 통제와 검증시스템이 갖춰지지 않는 한 핵 폐기라는 목표는 달성될 수 없다고 강변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사회엔 적절한 통제수단이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안전장치가 그것이다. 최근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가 제안했듯 세계는 민수용 원자로를 군사용으로 전용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확고히 지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핵무기 미 보유국들에 핵 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이는 특히 새로운 에너지원이 필요한 현 시점에서 원자력 르네상스를 위해서도 시급한 문제다.

2010년 핵확산금지조약(NPT) 개정 회의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다음 달 뉴욕에서 열린다. 이 회의에서 핵탄두 수의 감축, 포괄적인 핵실험 금지조약의 비준, NPT의 실질적인 이행 강화 등과 관련해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동안 제네바에서 진행돼 왔던 군축회담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수년간 국제사회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자간 핵무장해제협약의 기본 틀로서 핵무기를 상호 철수하는 ‘제로 옵션’이 검토돼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에 공감한다. 이제 점진적인 핵 폐기 과정이 시작돼야 한다. 하루아침에 성과가 나오지는 않겠지만 방향을 바로잡고, 핵 확산 방지 메커니즘을 강화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최근 들어 새로운 핵 확산의 물결이 지구촌 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 핵무기를 많이 보유한 나라들이 가장 무거운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 미·러 대통령을 비롯해 핵 보유국 지도자들이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 지구촌을 핵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과정을 시작하길 기대한다.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정리=박경덕 기자 ⓒ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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