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로 짚은 97]출판. '…가지'로 시작 '…가지'로 마감, 내실화 숙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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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우선 '…가지' 3파전이 눈에 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이레刊)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50가지' (홍익출판사) '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자작나무) .올해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수위를 다툰 책들이다.

감동적인 에피소드로 독자의 감성을 자극했다는 평가를 받는 '마음을…' 은 1백만부 이상 팔린 명실상부한 올해 최고의 셀러. 4월부터 거의 대부분 서점 집계에서 1위를 차지해오다 올 중반부터 '20대…' 와 바통을 주고받기를 여러 차례, 막판에 '선과 악…' 까지 가세했다.

출판계는 '가지' 로 새해를 열어 '가지' 로 한해를 마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10여종의 저서를 국내 출판사 7~8곳에서 앞다퉈 소개할 정도로 인기를 모은 나카타니 아키히로가 쓴 '20대…' 가 62만부, 14세기 스페인 우화를 다룬 '선과 악…' 은 30만부가 팔려나갔다.

올 한해가 유독 어려웠다는 출판계에서도 주목받는 기록이다.

97년은 '…가지' 3파전에 힘입어 '가지' 열풍이 몰아친 한해였다.

올해 출간된 책 가운데 '…가지' 라는 책제목은 무려 3백여종에 달한다.

이에 대해 창작과비평사의 한기호 이사는 "졸속 모방 출판에 급급하다보니 다양한 기획을 선보이지 못했다" 며 "출판사들 스스로가 성공한 책의 후광에 적당히 안주하려는 자세부터 반성해야 한다" 고 꼬집었다.

비소설류가 출판계를 주도한데 반해 소설.인문서는 이렇다할 베스트셀러를 내지 못한 흉년이었다.

번역소설 '람세스' (문학동네) , 이문열의 '선택' (민음사) 이 주목받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올 초반까지 꾸준했던 '아버지' (문이당) 의 인기를 뛰어넘지 못했다.

인문서도 별반 다르지 않아 지난해 3월에 나온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과 유홍준 영남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 (창작과비평사) 이 그나마 관심을 끌었다.

소설.인문서의 퇴조와 '…가지' 로 대표되는 비소설류의 급부상이 짧은 호흡의 글로 신세대 기호에만 영합해 출판문화의 '경박화 현상' 을 불러 일으켰다는 자성의 소리도 높다.

그러나 대부분의 출판사가 눈치 봐가며 책을 낼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잇딴 도매상의 부도등 전에 없는 불황이 가장 큰 이유. 올 한해 전국 60여개 단행본 도매상 가운데 10여개가 쓰러졌다.

체계화된 유통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출판계로서는 도매상의 부도가 곧바로 출판사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6억~8억원의 부도금액을 떠안게 된 출판사도 속출하는 등 사태가 이만저만 심각한 게 아니다.

지난 3월 연매출 2백억원대의 대형출판사 고려원이 부도가 난 이래 출판기획에 있어 운신 폭도 경기침체, 부도여파만큼 좁아졌다는 분석이다.

일부 출판사에서는 서점 집계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기 위해 사재기 물의까지 빚는 사태가 벌어졌다.

항간에 소문으로 떠돌던 추문이 꼬리를 잡혔다.

주간 '도서신문' 이 지난주 확인, 보도한 바에 따르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책들 가운데 출판사가 고의로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해 아르바이트생까지 고용한 조직적인 사재기를 일부 자행했다는 것. 이번 기회에 고질병인 사재기, 부풀리기 경쟁에 쐐기를 박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출판 불황의 극복을 위한 출판유통 구조의 합리화, 내실있는 출판기획 풍토 조성 과제는 다시 무인년 (戊寅年) 으로 넘겨졌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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