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칼럼]위기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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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스스로 폐업한 일본 야마이치 증권 사장이 직원들을 구제해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는 광경은 고실업 (高失業) 의 파고를 눈앞에 둔 우리 현실이 아니더라도 코끝을 찡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모두 제 탓입니다.

제 직원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고 울먹였다.

수많은 일본기업들이 그의 호소에 응하고 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대형사고가 날 때마다 걸핏하면 사과하던 청와대가 막상 국가부도라는 엄청난 참사를 내고는 사과 한마디가 없다.

오히려 "장관들에게 일을 맡겼더니…" 하는 뚱딴지 같은 소리들만 들려온다.

기아사태의 해결이 지연된 것도 대통령은 문제가 심각하다고 몇차례 경고했는데 전 부총리의 오만과 고집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며칠 전 고건 (高建) 총리가 지하철을 탔다가 "쇼 하네" 라는 야유를 듣고 망신당했다지만 이런 비난이 총리 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면 모든 잘못의 책임을 청와대에 돌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물론 칼국수 먹는 시늉만 하면서 주변의 부패를 방치하고 정책에 대한 아무런 이해없이 남의 머리에만 의존하다가 이 꼴을 만든 최고 책임자에게 가장 큰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 나라의 정치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이다.

그를 선택한 것도, 문민정부 초기에 90% 이상의 지지를 보낸 것도, 지금에 와서 그를 진창에 몰아넣고 짓밟고 있는 것도 이 나라 국민이다.

YS집권 직후 1차 사정을 벌였을 때 저항세력은 누구였던가.

바로 중산층이었다.

한국병의 병근 (病根) 이 부패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거기에 칼을 대자 박수를 보냈던 그들은 막상 그 칼끝이 자신들에게 되돌아오자 등을 돌렸다.

법조계 정화와 언론개혁이 필요하다고, 금융실명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그것이 자신들의 불편으로 돌아오면 반대하고 나선 것이 바로 중산층이었다.

정치인으로서 YS의 성공은 국민들의 지지에 따라 민주화투쟁을 끝까지 밀고 나갔던 데 있었고, 대통령으로서 YS의 실패는 국민들의 지지를 잃을까 봐 국민들이 싫어하는 일들을 중도에서 중단해버린 데 있었다.

요즘 경제위기의 책임자를 가려낸다고 야단들이다.

작게는 금융문제를 다룬 오만한 경제관리 등과 방만한 경영을 한 기업인들, 크게는 대통령의 정책적 무지에 책임이 있겠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천민 (賤民) 자본주의식 정경유착체제 속에 안주한 국민들의 부패불감증과 졸부형 (猝富型) 오만을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하의 엄혹한 시련이 닥쳐왔는데 그런 부패의식은 여전한 것 같다.

말로는 허리띠를 졸라 맨다고 하지만, 그리고 60, 70년대의 인내와 내핍을 또 못하랴고 다짐하지만 그동안 썩어버린 의식의 근저를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실제로 내핍의 고통이 피부에 체감되기 시작하면 또 정부를 탓하고, 지도자를 나무라고, 정치인과 기업인들에게 책임을 물으려 할 것이다.

또 분규가 일어나고 수많은 불만이 쏟아질 것이다.

그때 과연 누가 쓴약을 함께 마실 것이며, 고달픈 잠자리를 함께 할 것인지, 누가 국민 통합을 이룰 수 있는지가 가장 문제인 것이다.

대통령선거가 1주일 남짓 남았는데 지금 드러난 국민들의 선거의식엔 여전히 별 변화의 조짐이 없다.

기성세력의 특혜를 마치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는 부녀자들, 합리적 선택에 아예 귀를 막아버린 영.호남의 지역감정들, 그런 감정들을 겨냥한 공작선거와 부패선거의 흔적들은 여전히 국민들의 말초적인 감정을 촉발시키는데 집중되고 있다.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비전을 제시한다는 게 고작 국민들의 분노를 이용한 단순한 책임 규명 논쟁에 머물러 있다.

경제난을 불러온 리더십의 부재 (不在) 는 실은 리더십을 잘못 선택한 국민들의 자업자득 (自業自得) 일 따름이다.

IMF의 충격을 불러온 무능한 지도력을 선택한 데 대한 냉철한 자기 반성 위에서 오만과 허위와 부패의 고리를 끊는 진정한 정치개혁의 리더십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요란한 TV화면에서 잠시 눈을 돌려 한숨을 크게 쉬고 지난 5년간과 앞으로의 5년간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때인 것이다.

김영배 <뉴미디어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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