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16. 영어 공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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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 출전했을 때 동료와 함께 포즈를 취한 필자(오른쪽에서 둘째).

공군에서 제대한 뒤 친형 같은 주기선 선배의 권유로 농업은행에 입단했다. 이 팀엔 해병대에서 제대한 '악연'의 천상희가 먼저 입단해 있었다. 나와 공군에서 함께 뛰던 이경우.강현성이 합류하자 농업은행은 일약 강팀으로 탈바꿈했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농협으로 이름을 바꾼 우리 팀은 일본 원정경기에서 7전 전승을 했다. 내가 가는 팀마다 강팀으로 군림한 덕분에 나는 순탄한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62년 자카르타에서 제2회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이 대회에 나는 농구 대표팀 주장으로 출전했다. 성적은 동메달에 머물렀다. 여전히 필리핀.일본의 벽은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대회에서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귀국 후 매일 영어 문장을 한개씩 외웠다. 이 같은 영어 공부를 지금까지 40년이 넘게 해오고 있다. 5000~7000개의 영어 문장이 머릿속에 입력됐다.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은 문제가 많은 대회였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이스라엘.대만 선수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역도 경기는 끝내 열리지 못했고, 육상도 일부 국가만 참가한 반쪽대회였다. 이러다 보니 종목별로 경기와 관계없는 국제회의가 수시로 열렸다. 그런데 한국팀 본부엔 영어를 잘 하는 임원이 많지 않았다. 조동재.유한철씨 두분이 종목마다 열리는 국제회의에 도맡아 참석해야 했다. 나는 농구 대표팀 주장으로서 훈련 장소.시간 등을 알아보기 위해 선수단 본부를 들락거렸다. 서투른 영어와 몸짓으로 겨우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농구 관련 국제회의에 출석하라는 지시가 내게 떨어졌다. 영어로 진행하는 회의에 들어가면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참가국명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맨 먼저 표결권을 행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Agree? or Not?" 나는 이 말만 제대로 알아듣고 투표했다. 부끄러웠다. 이때 조동재씨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두면 장차 스포츠 외교에 큰 몫을 하게 될 것"이라며 격려해 줬다.

운동을 하다 보니 외국에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경기 중 심판에게 항의하고 싶어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참아야 했고, 관광 때도 가이드가 없으면 매우 답답했다.

나는 자카르타에서 돌아오자마자 농구와 관련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외국 기자와 영어로 인터뷰하는 꿈을 꾸었다. 내 영어 실력은 갈수록 늘었다. 신용보증기금에 근무할 때 미국.일본.유럽.호주 등에서 열리는 국제금융 관계 회의에 참석할 기회가 많았다. 나는 외국인들과 격의없이 대화하며 분위기를 한껏 띄워 좋은 점수를 받았다. 당시 미국인들의 주요 화제는 날씨와 스포츠였는데 다행히 농구선수 출신인 나는 해외 스포츠에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요즘 대부분의 운동선수가 학업을 소홀히 해 사회 적응에 애를 먹는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특히 골프.축구.야구 등 프로스포츠 선수들이 해외 진출 때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돼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적어도 외국어만큼은 틈틈이 익혀 장래를 대비하는 게 바람직하다.

아무튼 나는 영어 공부 덕분에 훗날 영어 원서를 통해 익힌 농구 이론.실기를 후배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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