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돋보기 ④ 벨기에 500프랑 지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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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미술관이 단순히 그림 감상의 즐거움을 넘어 열정적인 학습의 장이 됐다. 전시의 주인공은 초현실주의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1898∼1967). 그는 익숙한 사물의 크기를 바꾸거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에 배치하는 이른바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을 사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형성했다. 기발한 발상과 유쾌한 상상력. 그의 그림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린 사람들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인식의 틀이 조금씩 깨지는 즐거움을 만끽했으리라.

‘중절모 신사’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려온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탄생 100주년인 1998년부터 유로화 통합(2002) 이전까지 벨기에에서 사용된 500프랑 지폐 뒷면 도안이다.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제공]


1998년 벨기에 중앙은행은 마그리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500프랑 지폐를 발행했다.

앞면엔 화가의 초상이 들어갔다. 초상 뒤 그림자가 재미있다. 마그리트가 즐겨 그린 중절모 쓴 신사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나뭇잎·새·문·열쇠구멍·파이프 등이 위조방지 장치로 변환돼 등장한다.

뒷면에는 겨울비처럼 하늘에서 내려오는 중절모 신사들, 사자 꼬리가 달린 의자, 중력을 무시한 채 공중에 떠 있는 건물, 눈과 입이 달린 사과까지 대표작들의 이미지를 재구성해 또하나의 작품이 됐다.

마그리트는 화가보다는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다. 그의 실험적인 예술성과 심오한 철학적 깊이를 제한된 공간에 담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었겠지만 화폐 디자이너의 마그리트에 대한 존경 심이 엿보인다.

마그리트는 유로화 통합으로 더이상 볼 수 없게 된 벨기에 지폐 뿐 아니라 대중문화 곳곳에 숨어있다.

비틀스와 롤링스톤스, 영화 ‘매트릭스’, 소설가 김영하,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공통점은 뭘까. 답은 마그리트. 그들의 작품 속에서 마그리트의 장난기 어린 눈빛을 찾아보는 것도 큰 기쁨이 될 것이다.

백남주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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