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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현 정권의 ‘K·K 크로니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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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이명박 정권은 박연차 같은 매수자(買收者)의 공격에 취약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 ‘개혁 세리머니(ceremony)’가 없다. 역사적으로 정권들은 집권 초에 도덕적 개혁을 부르짖었다. 비록 나중엔 아들과 측근들의 비리로 허물어졌지만 집권 초엔 그래도 요란하게 개혁을 외치는 세리머니가 있었다. 김영삼(YS)은 천문학적인 대선자금을 쓰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심리적 반(反)작용이었던가. YS는 칼국수를 먹으며 순교자적 절제를 보였다. 몇몇 핵심 참모는 『불씨』 같은 개혁 이야기를 읽으며 전도사를 자처했다. 노무현 정권의 개혁 세리머니도 대단했다. 깨끗한 정치를 한다며 민주당을 깨부수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 창당은 잘못된 것이었고 정권의 끝은 보는 바와 같지만 그래도 정권 초엔 뭔가 다르게 해보겠다는 제스처라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엔 그런 의식(儀式)이 없다. 경제 살리기와 선진화의 구호는 컸지만 도덕적 개혁의 소리는 작았다. 그러니 ‘강부자’ ‘고소영’ 내각 파동이 우연한 게 아닌 것이다.

크로니즘(cronyism·정실주의)으로 볼 때도 이명박 정권은 전임 정권 못지않게 불안한 구석이 많다. 박정희 정권엔 ‘쿠데타 크로니즘’, 전두환·노태우 정권엔 ‘5공 크로니즘’이 있었다. YS 정권은 ‘상도동 크로니즘’이었다. 민주화 운동을 같이 했어도 동교동은 끼워주지 않았다. 경상도 사투리만 난무했다. 김대중(DJ) 정권 때는 ‘호남 크로니즘’이 지배했다. 모든 길은 광주와 목포와 전주로 통했다. 노무현 정권을 뒤흔든 건 ‘386 크로니즘’이었다. 아스팔트와 최루탄과 감옥 생활로 엮어진 것이다. 노 대통령 자신도 386을 자처했고 386들은 대통령을 ‘우리들의 도구’로 간주했다. 386 크로니즘의 최대 약점은 돈이었다. 생활비, 품위유지비, 정치자금, 법원 추징금, 그리고 반미주의 대통령의 아들 미국 유학을 위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박연차·강금원 같은 비(非)운동권도 흔쾌히 패밀리로 접수한 것이다. 이명박 정권엔 ‘KK(고려대·경상도) 크로니즘’이 있다. ‘민족 고대’는 어느덧 글로벌을 외치는데 크로니즘은 여전히 로컬(local·국지적) 수준이다.

MB는 어떻게 해야 크로니즘의 덫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친하고 믿을 만하며, 게다가 능력 있는 사람을 쓰지 않을 도리는 없다. 신뢰하는 사람만 써야 하는 자리가 꼭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해법은 감시다. 쓰되 철저히 감시하는 것이다. 민정수석실로 부족하면 특별감찰팀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사정팀을 시켜 기업인 100여 명의 집을 사진 찍도록 했다. 호화주택인지 들여다본 것이다. 박 대통령은 앨범을 보며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런 집은 안 되겠어요. 근로자와 국민은 고생하는데 자기 돈이라고 마음대로 쓰다니….” 김 실장은 기업인들을 조용히 불렀다. 기업인들은 대부분 “바이어 접대용”이라고 둘러댔다. 김 실장은 “대통령 집도 비좁다. 검소하면 바이어들이 더 감동할 것”이라고 설득했으며 기업인들은 돌아가서 집을 처분했다고 한다. 물론 세상은 70년대가 아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대통령이 쓸 수 있는 감시의 칼은 많다. 백악관은 고위직을 임명하기 전에 1~2달간 뒤진다. 역대 정권의 운명을 여기서 끝내느냐, 모든 건 MB의 의지에 달렸다.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