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서] 푸슈킨 친필 원고와 푸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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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자신의 고향인 러시아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해 이 도시의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지부에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안겼다.

19세기 러시아의 세계적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이 직접 손으로 쓴 시(詩)가 담긴 원고였다. 푸슈킨이 1829년 쓴 '그루지야의 언덕에서'라는 제목의 시를 담은 이 희귀 원고는 국외로 반출된 뒤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했었다.

러시아 문학의 중심지임을 자부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민들은 푸틴 대통령의 예기치 못한 선물에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이 원고는 러시아의 대규모 은행 중 하나인 '대외무역은행' 사장 안드레이 코스틴이 영국 런던의 경매장에서 프랑스의 개인 골동품 소장가로부터 16만5000파운드(약 3억5000만원)의 거금에 사들여 푸틴 대통령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올 2월에는 러시아의 석유.알루미늄 재벌인 빅토르 벡셀버그가 제정 러시아 황실의 보물로 미국 포브스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고급 공예품 '파베르제의 달걀'을 1억여달러에 구매해 국내로 들여왔다.

보물은 현재 크렘린 내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기업인들의 이 같은 선행이 순수히 애국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일까. 대답은 글쎄다.

대부분 90년 대 초반 국유재산 사유화 과정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러시아의 대기업인들은 지난해 말 정부가 거대 석유기업 유코스에 대한 수사를 시작한 이후 바짝 자세를 낮추고 있다. 혹시라도 사정기관의 칼날이 자신을 향하지 않을까 우려해서다. 이들은 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푸틴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종 전시성 기부행사에 앞장서고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 기업인들의 해외반출 유물 사들이기의 속셈은 뭘까. 결국 생존을 위한 보신주의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건 아닐까.

유철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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