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많은 동포 노인들, 김치·온돌 맘껏 누리게 하고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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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호 14면

① 생신을 맞은 ‘고향의 집’ 입소 노인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며 즐겁게 해드리고 있는 윤기 이사장. ② 4일 교토에서 열린 고향의 집 준공식은 한국인·일본인 참가자들이 태극기 모양의 고명을 얹은 대형 전주비빔밥을 함께 비비는 것으로 마무리됐다.③ 교토에 새로 문을 연 고향의 집 전경.

4일 일본 교토 미나미구에서 한 노인요양원의 준공식이 열렸다. 시설이 최신식이라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노인홈일 뿐이다. 그런데 축사를 하는 인사들의 면면이 이채로웠다. 가도카와 다이사쿠(門川大作) 교토 시장, 고바야시 아키로우(小林あきろう) 교토시의회 부의장, 오영환 주오사카 대한민국총영사, 김수한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 마치 한·일 친선 축제 행사의 개막식처럼 보일 정도였다. 준공식은 대한해협 너머 김완주 전북도지사가 보낸, 태극기 모양의 고명이 얹어진 100인분짜리 전주비빔밥을 함께 비비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일본서 재일동포 노인홈 네 곳 세운 尹基 이사장

행사 시작 무렵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봄비에 누구보다 마음을 졸이는 이가 있었다. 시설을 세운 일본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인 윤기(67·사진)씨다. 일본 이름은 다우치 모토이(田內基). 키가 1m60㎝도 안 될 듯한 그의 얼굴은 오랜 꿈이 또 하나의 결실을 본다는 흥분감 때문인지 상기돼 있었다. 사카이·오사카·고베에 이어 교토에 문을 연 네 번째 ‘고향의 집’! 타향 땅에서 쓸쓸히 삶을 마치는 재일교포 1세대를 위해 노인홈 만들기 운동을 벌여온 지 25년 만의 일이다.

#1. 81세의 이분이 할머니는 대구가 고향이다. 돈을 벌러 먼저 온 오빠를 따라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온 지 70년이 흘렀다. 할머니는 그 세월을 한국 이름과 국적을 꿋꿋이 지키며 살아왔다. 아버지는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을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오빠는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태평양전쟁에 끌려간 남편을 기다리며 일본에 남았다. 남편은 전장에서 무사히 돌아왔지만 결국 4남매를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떴다. 한국의 직계가족도 모두 저세상 사람이 된 지금, 이 할머니는 “아무것도 없이 부끄러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네 자녀가 각자 가정을 이루고 있는 이곳 교토에서 여생을 마칠 생각이다. 하지만 심장질환 때문에 몸을 굽히는 일조차 버거워 더 이상 김치를 담가 먹을 수가 없다. 마침 교토에 새로 문을 연 고향의 집에 입소한 이 할머니는 “시설도 좋지만 무엇보다 진짜 한국식 김치를 매끼 먹을 수 있다는 게 맘에 든다”며 흐뭇해 했다.

#2. 치매증세 때문에 고향의 집 특별양호층에 들어온 야마시타 가즈에(山下一枝·80) 할머니는 일본에 귀화한 한국인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말은 전혀 못하지만, 부모님이 통영 출신이고 아버지 성이 옥씨라는 것은 기억한다. 그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는 점이 또 있었다. 김치다. 어릴 적 어머니가 항상 담가주셨던 김치, 얼마 전까진 그 역시 직접 담가 자식들과 이웃에게 나눠주곤 했다고 한다.

‘고향의 집’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윤기 이사장은 서슴없이 “김치와 우메보시(일본의 기본 밑반찬인 매실 장아찌)를 함께 먹을 수 있고, 온돌과 아리랑이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곳에 입소해 있는 두 할머니를 만나자 그 말의 의미가 와닿는다. 고향의 집은 바닥이 모두 맨발로 돌아다녀도 되는 온돌이다. 곳곳엔 한국의 전통 서랍장과 반닫이가 놓여 있다. 음악치료실에선 아리랑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치매를 앓는 노인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한국말로 넋두리를 해도 알아듣고 받아줄 한국인 복지사가 있다.

모친은 ‘목포 고아들의 어머니’
“어머니는 일본인이지만 30여 년을 목포에서 고아들을 돌보며 한국인과 다름없이 사셨어요. 그런데 병환으로 쓰러지시더니 어느 날 갑자기 일본말로 ‘우메보시가 다베타이(매실 장아찌가 먹고 싶다)’라고 말씀하시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았죠. 그 뒤로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말을 하지 않으셨어요.”

윤 이사장은 전도사였던 아버지가 세운 목포의 사회복지시설 ‘공생원’에서 태어나 고아들 속에 섞여 자랐다. 어머니 윤학자(일본명 다우치 지즈코) 여사는 남편이 한국전쟁 때 아이들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가 행방불명되자 일본인이자 여성이라는 이중 약점을 딛고 공생원을 맡아 지켜왔다. 1968년 별세했을 때는 시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을 정도로 ‘목포 고아의 어머니’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어린 시절 ‘쪽발이’란 놀림을 당하던 아들에게 한국인임을 명심하게 해줬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도 임종 시엔 일본말로 우메보시를 찾다니….

그 충격적인 기억을 다시 떠올린 것은 15년이 흐른 뒤였다. 모친 사후 공생원 원장으로 취임한 윤 이사장은 사회봉사활동 범위를 서울은 물론 일본으로까지 넓혔다. 외동딸인 어머니 호적에 어릴 적에 입적된 까닭에 일본인 국적을 가진 데다, 아내도 일본인 사회복지사였기에 활동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던 83년, 사망한 지 13일이 지나서야 발견됐다는 한 재일교포 노인에 대한 신문 기사가 그의 뇌리를 때렸다. 일본인 사이에선 차별받고 고국에선 잊혀진 설움을 곱씹으며 살았을 재일교포들이 죽음마저 외롭게 맞는다는 사실에 가슴 아팠다.

윤 이사장의 추진력은 이듬해 아사히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걸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발휘됐다. 그의 재일교포 노인홈 만들기 운동은 일본인들의 양심을 건드리며 수천 명의 기부자를 끌어냈다. 모친의 생애를 담은 책 『어머니는 바보야』를 영화화한 ‘사랑의 묵시록’(95년, 김수용 감독)도 일본에서 개봉돼 많은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89년 사카이에 첫 고향의 집이 문을 열었다. 윤 이사장은 건립 과정을 수기 형식으로 쓴 책에 ‘김치와 우메보시’라는 제목을 붙였다.

“일본에 최소 10곳 필요, 다음은 도쿄”
교토 시설은 단기입소자까지 포함, 총 16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지역 주민들의 정서를 고려해 일본인도 받을 수밖에 없지만 현재 90여 명의 입소자 가운데 절반가량이 한국인이다. 윤 이사장은 “차별 때문에 일본인 행세를 하며 평생을 살아온 교포들이 많다”며 “(고향의 집에) 들어오고는 싶지만 자녀들을 위해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게 드러나면 안 된다고 하시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다행히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대신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최근 바뀐 일본의 개호보험법에 따라 ‘유니트 케어 시스템’으로 짓다 보니 입소비의 평균 10%를 내는 노인들의 본인부담액이 커졌다. 저소득층이 많은 1세대 재일교포 노인들이 쉽게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숙제다. 개인 사생활을 중시하는 유니트 케어 시스템은 입소자 모두 일정 크기 이상의 1인실을 사용하고 10명당 하나의 유니트로 묶어 거실 등 공동 생활공간이나 관리 담당자도 따로 두도록 하는 방식이다. 당연히 건립비도 이전보다 몇 배나 많은 26억 엔이 들었다. 이 가운데 20억 엔은 기부금과 저리대출 등으로 마련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한국에서도 100만인 후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윤 이사장은 “이런 노인홈이 일본에 최소한 10곳은 있어야 한다”며 “다음 목표지는 도쿄”라고 말했다. 모처럼 서울에서 하나뿐인 외손자가 왔어도 놀아줄 틈이 없는 할아버지의 ‘이유있는’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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