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 盧패밀리 넣어달라는 얘기 전해듣고 그냥 웃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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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호 06면

6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이래도 신자유주의인가?’라는 제목의 장하준 교수 초청 강연회에서 정두언 의원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8일 오전 11시. 서울에 있는 한 정부 산하기관 회의실에서 ‘정두언식 소통’을 다시 접했다. 50명이 채 안 되는 기관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다. 기자는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그의 승합차에 동승해 30여 분간 얘기를 나눴다. 10일 오전엔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본회의 참석 채비를 하던 그와 마주앉아 현안을 물었다. 주저하던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정두언이 밝힌 추부길 의혹

5년마다 반복되는 역사 안타까워
-최근 ‘박연차 리스트’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가족까지 거론되고 있다.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가장 도덕적이라고 주장하던 정부가 비도덕적이었다는 것이. 우리 역사에 이런 일이 5년마다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 아쉽다.”

-이명박 정부도 4년 뒤 자유로울 수 있겠나.
“이런 불행의 고리를 깨는 최초의 정부가 돼야겠지. 법대로, 원칙대로 하면 된다.”

-추부길 전 비서관이 정 의원에게 “대통령 패밀리까지는 서로 건드리지 않도록 하자. 우리 쪽 패밀리에는 박연차도 포함시켜 달라”는 노건평씨의 부탁을 전했다는데.
“추 전 비서관이 북한 다녀온 소식도 전하고(추 전 비서관은 북한대첩비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자격으로 지난해 10월 북한에 다녀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나온 말이다. 노건평씨가 박연차를 그쪽 패밀리로 해달라더라는 말에 서로 웃고 말았다.”

-뭐가 우습나.
“박연차를 패밀리로 넣어달라는 말 자체가 너무 웃기지 않나.”

-가족도, 정치적 동지도 아닌 후원인을 패밀리로 간주해 달라는 게 우습다는 얘긴가.
“일단 말이 안 되지 않나. 세상에…. 그 말을 듣자마자 ‘너무 웃긴다’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패밀리’라는 말 자체가 지금의 결과를 보여준 것 같다. 얼마나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었으면….”

-웃고 넘기고 로비에는 응하지 않았다는 건가.
“(고개를 저으며) 나한테는 로비가 아니지.”

-무슨 뜻인가.
“알다시피 내가 그때 고단한 처지에서 도를 닦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웃으면서 그런 얘길 한 거다. 나는 그 당시에 로비를 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 지금은 로비를 할 만한 대상인가.
“지금도 뭐…. 그래도 그때보다는…. 그때는 정말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고단한 기색이 스쳤다. 정 의원은 지난해 6월 ‘권력 사유화 발언’ 파문 이후 정치적 칩거에 들어갔다. 스스로 ‘자숙의 시간’이라 부른 날들이었다.

박영준은 실무적 희생양
-그때 일들은 다 털었나.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사람이…, 시간이 흐르면서 성숙해지는 것 같다. 용서라는 게 참 힘들다. 그러고 보면 넬슨 만델라는 참 대단한 사람이다.”

-박영준 총리실 국무차장(전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과도 화해했나.
“그는 당시 (내가) 이상득 전 국회 부의장과 견해차로 갈등이 있었을 때 실무적으로 희생된 사람이다.”

-지금은 견해차가 없다는 뜻인가.
“견해차가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이 전 부의장을) 잘 보좌해서 순기능을 하도록 하겠다.”

-요즘은 ‘형의 남자’라는 말도 돈다.
“원래 좋은 관계였다.”
이 전 부의장이 정 의원의 후원회장도 계속 맡고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오 전 의원이 귀국했다. 만나봤나.
“아직…. 전화 통화만 했다.”

-‘이상득-이재오-정두언’ 권력의 삼각축이 복구되는 건가.
“(크게 웃으며) 삼각축? 나는 그런 급이 못 된다. 다른 두 분께서 나와 함께 이름이 거론되는 게 언짢지는 않으실지 모르겠다.”

8일 강연에 앞서 사회자가 ‘왕의 남자’ ‘대통령의 복심’이라고 소개하자 “요즘은 언론에서도 ‘한때 복심’이라고 한다”고 농담을 던지던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경주 재·보선 때문에 친이-친박 갈등이 다시 불붙는 것 같다.
“(친이도 친박도 아닌)제3의 후보를 냈으면 좋았을 텐데….”

-정종복 후보 공천 말인가.
“둘 다 마찬가지 아닌가. 서로가 양보했으면 좋았을 거다.”

-정수성 후보는 친박 성향을 내세웠지만 무소속인데.
“그거야…, (친박 쪽에서)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거지….”

경주 재·보선 ‘제3의 후보’ 냈어야
정작 ‘소통 전도사’ 정 의원이 세상과 소통을 재개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난해 11월 국민소통위원장을 맡았지만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언론 인터뷰를 자제해 왔다. 기자와의 대화도 사진 촬영을 곁들인 정식 인터뷰는 아니었다.

-왜 자꾸 인터뷰를 안 하려고 하나.
“내가 지금 조용히 있어야지 그렇게 말을 할 때가 아니다. 현안 얘기를 묻는데 교과서 같은 말만 하면 ‘이건 정두언이 아니다’라고들 할 테고.”

-지난해 그 일 때문인가.
“많이 배웠다.”

-그럼 이제 ‘솔직한 정두언’은 못 보는 건가.
“쉰이 넘은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나. 아직 때가 아닌 거다.”
그는 현재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해 “속상하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화제를 장하준 교수 강연으로 돌렸다.

-‘정두언이 장하준을 초청했다’는 것만으로도 화제였다.
“내 생각과 완전히 다른 사람의 얘기도 경청하는 것이 소통 아닌가.”

-‘정두언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나섰다’고 한다. 맞나?
“그런 말을 들을 각오를 하고 마련한 자리다. 원래 방향을 45도 정도 바꾸려고 하면 90도만큼 틀어야 되는 거다. 신자유주의를 돌아볼 때가 된 것도 맞고.”

-진보 논객인 진중권 중앙대 교수가 그 세미나와 관련해 정 의원 칭찬한 글을 봤나.
“(큰 소리로 웃으며) 그랬더라.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뭐 기분이 썩 좋진 않던데…. 어떤 사람한테는 비판받을 때가 더 기쁘기도 하다.”

-소통위원장으로 통통 튀는 행보가 돋보인다. 예상 외의 활약이다.
“(고개를 저으며)내가 한 게 ‘쇼’밖에 더 있나.”

-그 쇼가 중요한 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

정 의원은 “나는 모략을 꾸밀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은 못 되지만 이벤트는 잘 연출한다”며 “우리(정치인)는 연예인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했다. “어느 정도 인기 관리도 해야 하고, 조금 위험하더라도 강하게 발언을 해야 언론이 보도해줘서 사람들과 소통도 할 수 있고….”

고급 승용차 대신 이쑤시개며 필기구 등 각종 생활용품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는 승합차를 타고 이동하는 그의 모습이 바쁜 일정에 쫓기는 연예인 같기도 했다. (실제로 정 의원은 가수협회에 등록된 연예인이기도 하다. 음반을 세 장이나 냈고 최근엔 트로트 음반을 작업 중이다.)

인터넷 법으로 규제하는 건 반대
-솔직히 좀 ‘소통’을 못하는 이미지다.
“사실 그렇다. 아내와의 소통도 그렇고…(웃음). 하지만 꽤 나아졌다. 많이 들으려 하고 있다.”

강연장에서 청중의 질문을 경청하던 모습이 오버랩됐다. 그는 몇 차례의 농담과 가족사를 곁들인 솔직한 고백, 부드러운 목소리로 호응을 이끌어냈다.

-당내에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은 없나.
“있지. 남의 말을 안 듣는 사람.”

그는 뜻밖에도 친박계 등 세간에 그의 정적으로 알려진 인사가 아니라 고집 세기로 유명한 한 당직자를 거론했다. “듣는 게 가장 기본이거든. 결론은 그거예요. 소통은 듣는 거.”

-한나라당에서 추진하고 있는 인터넷 규제법안에 대한 청중의 질문에 “나는 반대한다”고 답하던데.
“내가 명색이 소통위원장인데 법으로 막고 어떻게 소통을 하자고 하겠나. 물론 인터넷 토론방의 악플은 인격 파탄이다. 사회적 중지를 모아 개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법을 만들면 부작용이 생긴다. 포털의 자율규제에 맡기는 게 낫다.”

-기후변화특위 활동도 하던데…. 정치 활동을 쉬는 대신 인터넷·소통·기후변화 등 현재 가장 각광받는 이슈를 선점했다는 평이 있다.
“내가 의식적으로 그런 건 아니다.”

정 의원은 스스로를 당직 한 번 못해 본 ‘왕(王) 비주류’라고 했다. 지금 맡고 있는 국민소통위원장도 디지털정당위원장 산하다. ‘당직’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자리다.

-당직에 도전 안 하나.
“업(業)보다 직(職)을 중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일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소통이나 기후변화 같은 업무도 중요하지만 국회의원으로서 내가 속한 상임위(교과위) 활동에 먼저 충실할 생각이다.”

그는 ‘업보다 직을 중시하는 몇몇 사람’에 대해 날 선 비판을 하면서도 이름이나 이니셜을 거론하는 대신 “(기자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라고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밝혀진다”며 기다림을 말하기도 했다.
‘정두언식 소통’은 예전과 좀 달랐다. 특유의 소탈한 말투는 그대로였지만 조심스러움이 배어있었다. 그의 말대로 지난해 많은 것을 보고 느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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