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2위 굴레 벗고 ‘글로벌 빅4’ 맹주 노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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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호 28면

미국 호황의 절정기인 2006년 11월 29일 뉴욕의 럭셔리 호텔인 매리엇 마키스의 대회의실에 월가 메이저 금융회사 간부 400명이 모여들었다. 미 포드자동차의 최고경영자(CEO) 앨런 머랠리(64)의 자금조달 계획을 듣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는 선임된 지 100일도 안 된 신참 CEO였다. 연단에 올라선 그는 놀라운 제안을 내놓았다. 포드의 모든 자산을 담보로 제시할 테니 180억 달러를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돈 풍년의 절정기에 보기 드문 제안이었다. 많은 금융회사가 돈을 꿔주겠다고 나섰다. 머랠리는 계획보다 많은 236억 달러를 조달했다.

앨런 머랠리 포드 최고경영자

자금 조달 직후 머랠리는 “이 돈이 경기침체나 돌발적인 사건에도 포드가 살아남을 수 있는 안전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 자동차 중심지인 디트로이트에서는 “금융 상황을 모르는 기술자 출신 CEO가 일어날 확률이 낮은 미래 사건에 대비해 지나치게 많은 돈을 조달했다”는 촌평이 나돌았다. 머랠리는 항공기 기술자 출신이다.

그 뒤 2년여 세월이 흘렀다. 미국 최대 자동차 회사인 GM과 3위인 크라이슬러가 파산의 궁지에 몰려 있다. GM은 6월 1일까지, 크라이슬러는 4월 말까지 자구계획을 마련하지 못하면 파산보호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가 말한 ‘경기침체나 돌발적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셈이다.

포드는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은 편이다. 지난해 147억 달러를 손해 봤지만 미리 조달한 236억 달러에 힘입어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자동차 노조 쪽과 협상에도 성공해 임금을 미국 내 도요타 수준으로 낮췄다. 덕분에 포드는 임금 비용을 연간 5억 달러 줄일 수 있게 됐다. 재규어와 랜드로버 등 영국 자회사를 인도 타타 그룹에 팔아 넘겼다.

머랠리는 자신의 보수도 깎았다. 지난해 그는 기본급 300만 달러와 스톡옵션 등을 합해 모두 1360만 달러를 받았다. 그는 올해 연봉을 950만 달러로 낮췄다. 지난해보다 30% 정도 줄어든 액수다. 기본급 300만 달러는 변함이 없지만, 스톡옵션 등을 최대한 줄여 전사적으로 벌이는 허리띠 졸라매기에 모범을 보였다.

이렇게 해서 이달 초에는 부채 99억 달러를 줄일 수 있었다.

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자동차 담당 애널리스트인 존 머피는 지난주 뉴욕 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머랠리가) 앞날을 내다보고 미리 준비한 덕분에 포드는 GM이나 크라이슬러와 다른 길을 걸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포드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자 미국 고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 파산할지 모르는 GM이나 크라이슬러 차를 사기보다 포드 차를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머랠리는 지난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GM과 크라이슬러의 불행을 이용할 의도는 없지만 우리 제품이 더 많이 팔렸으면 한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실제로 그는 GM과 크라이슬러 차를 즐겨타다가 이번에 포드 차를 산 고객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요즘 월가에서는 포드가 일본 도요타·혼다, 독일 폴크스바겐과 함께 ‘차세대 글로벌 빅4’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번 위기를 잘 극복하면’이라는 단서가 붙은 전망이기는 하지만 주식시장은 그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6개월 새 포드 주가는 100% 넘게 상승했다. <그래프 참조>

머랠리는 2006년 9월 항공기 업체인 보잉의 여객기 부문 사장 자리를 버리고 포드 CEO를 선택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37년 동안 일했던 친정을 떠나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자동차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그를 영입한 사람은 포드 설립자의 증손자인 윌리엄 클레이 포드 회장 겸 당시 CEO였다. 포드 회장은 자동차 업계의 통념에 물들지 않은 머랠리를 영입해야 위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포드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포드 회장은 머랠리가 기술자 출신이면서도 놀라운 경영 능력을 보여 준 점을 높이 평가했다. 머랠리는 유럽 에어버스의 공세에 밀려 고전하던 보잉 여객기 부문을 2000년 이후 소생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덕분에 보잉은 군용기 시장에서 부진했지만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머랠리가 포드에 입성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자금 확충이었다. 2006년 11월 당시 포드의 재무 상태는 GM보다 좋지 않았다. 머랠리는 전체 자산을 담보로 제공하는 아이디어로 월가를 설득했다. 주효했다.

그의 다음 과제는 연비가 뛰어난 차를 개발해 일본·독일·한국 업체와 경쟁하는 일이다. 그는 연료 효율을 극대화한 여객기 보잉787 ‘드림라이너’를 개발해 에어버스 공세를 따돌렸다. 전문가들은 그가 자동차 산업에서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그는 “여객기와 자동차 사업이 놀랍도록 닮았다”며 “둘 다 최첨단 기술을 적용해 안전성과 연비를 극대화해야 고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떤 첨단 기술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하이브리드와 전기 자동차를 예로 들었다. 특히 그는 “차세대 자동차의 승패는 하이브리드가 아니라 전기 자동차 부문이 될 듯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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