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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석 칼럼]소비자탓과 외환관리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요새 한국 경제에서는 무너지는 것이 일반적이고 버티고 있는 부분은 특수현상이 됐다.

쓰러진 기업을 은행이 구제금융으로 받치고 쓰러지려는 은행을 정부 (한국은행)가 구제금융을 주어 받친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이 외환부도를 내고 쓰러지려 하자 정부는 세계의 중앙은행이라는 국제통화기금 (IMF) 과 외국 정부에 구걸 행각을 나섰다.

이 총중에 아직도 굳건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튼튼해 가고 있는 부문이 한국 경제에는 있다.

다름 아닌 이른바 매크로 펀더멘털 (기본상황) 이다.

매크로 펀더멘털의 지배적 모습은 소비와 저축이다.

이것은 집단으로서의 소비자가 결정한다.

사람은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다.

한국 경제의 생산부문은 농업.제조업.서비스업 (특히 금융업과 정부서비스업) 이 평균해 모두 영업 결손이나 과도한 빚 때문에 쓰러져 있다.

이것이 부실의 원인이다.

그러나 소비자로서의 한국인은 너무도 모범적이다.

세계 최고급의 저축률을 가지고 있다.

이런 한국의 소비자에게 요새 또 한번 '과소비' 누명 씌우기가 벌어지고 있다.

국제수지 적자등 요즘의 경제 난국이 특히 수입품과 해외관광에 '물쓰듯' 돈을 쓰는 소비자 때문이란 것이다.

펑펑 돈을 쓰는 '정열적 소비자' 의 존재는 모든 자연스러운 통계 분포 (이른바 정규분포) 엔 반드시 있는 극단적 일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람의 낭비를 포함해 한국인의 평균 저축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점이다.

예외적인 낭비자를 나무라는 역할은 개별적 치료 수준에서 가족이나 친구의 방안 목소리만이 그나마 효과를 내지 않을까. 한국의 국제수지가 적자를 보이고 있는 것도 전적으로 생산자 탓이지 소비자 탓이 아니다.

관광수지 적자만 해도 볼거리는 없는데다 (관광자원의 빈약) 바가지 요금과 불친절이 그 원인이다 (관광업의 실패) .그래서 외국관광객이 안 오는 것이라면 거기에 맞춰 우리도 해외관광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다만 이를 달성하자면 소비자를 꾸짖기보다 가격체계가 소비자로 하여금 외국관광 절약 쪽을 선택하도록 돼야 한다.

가격체계의 왜곡을 가져온 것은 정부라는 서비스 생산업자였다.

외화가격을 너무 낮게 유지해 온 탓이다.

86년에서 96년에 이르는 10년 사이 국내 물가는 생산자의 그것이 30.7%, 소비자의 그것은 65.6%나 올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미 (對美) 달러환율은 오히려 2.0%가 내렸다.

이래 놓으니 수입은 태산처럼 불어나고 수출은 경쟁력이 없어졌다.

이자와 환율이 싼 외국 돈을 빌려 투자하는 바람에 노임.원화이자율.땅값은 마구 올랐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바는 그것의 당연한 뒤풀이다.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은 소득 1만달러 달성과 물가안정을 원화의 턱없는 고평가 하나에 기대어 실현했다.

지금 이 사상누각이 무너지고 있다.

소비자의 '무오류 (無誤謬)' 를 여기서 굳이 변명하고 나서는 것은 실은 소비자를 위해서가 아니다.

근거없는 질책의 눈보라 때문에 소비자가 흔들리고, 그래서 한국 경제의 마지막 보루인 건전한 매크로 펀더멘털마저 넘어질까봐 염려해서도 아니다.

원화 고평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외환관리법의 힘이다.

이 법은 이른바 기준환율을 정할 수 있는 힘을 시장이 아니라 재정경제원장관에게 주고 있다.

그리고 외환 사용의 범위를 정해 그것을 위반하는 사람은 형사처벌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이 법은 철폐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소비자의 외환 낭비에 죄를 물어 적반하장 (賊反荷杖) 격으로 이 법에 의해 그런 소비자를 처벌하겠다고 검찰총장이 나섰다.

이렇게 나가면 철폐해야 할 외환관리법의 존재 이유만 도리어 강화된다.

소비자에게 경제 난국의 책임을 묻는데 열중하는 동안 진짜 중요한 생산 측면의 경제구조 수선은 초점에서 멀어져 버린다.

이러다가는 이미 넘어진 한국경제 위에 흙이 덮이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말 것이다.

그것이 겁난다.

강위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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