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실 없는 CEO 추락하던 OB에 날개 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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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림 사장 집무실 모습.

서울 서초구 소재 OB맥주 본사 5층 임원실. 개인 방은 물론 칸막이도 없다. 볼품 없는 책상 10개가 줄지어 놓여 있을 뿐이다. 한눈에 봐도 확 트인 공간이다. 임원실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팻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탕비실·복사실이라고 적혀 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이곳이 나온다.

“탕비실·복사실 팻말 따라 들어가면 임원실 나와 … 열린 경영 높은 실적 이끌어” #장벽을 허물어라! - 인터뷰 OB맥주 이호림 사장의 ‘벽 털기 경영법’

사장실은 따로 있을까? 아니다. 이호림(49) 사장은 8명의 임원과 함께 일한다. 박희용 HR 상무와 짝꿍이고, 이영상 F&A 전무와 마주 보고 있다. 책상 모서리가 개인 공간을 구분하는 유일한 분기점이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이 사장이 취임했던 2007년 4월, 이곳은 꽉 막힌 공간이었다.

그럴듯하게 꾸며진 사장실·임원실이 가득했다. 이 사장의 회상이다. “당시 OB맥주는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조직에 활력이 없었죠. 웃음기를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감추는 것도 많았어요. 감사를 해야 털어놓는 일도 적지 않았죠.”

유형의 벽 털어 위기 탈출

OB맥주(당시 동양맥주)는 주류업계의 상징이자 간판이었다. 하지만 1991년 발생한 낙동강 페놀사건 이후 하향세를 탔다. 이 사건은 두산전자의 페놀원액 저장탱크에서 30t의 페놀원액이 유출돼 상수원을 오염시킨 것을 말한다. 위기 탈출을 위해 OB맥주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사명을 교체(1995년·동양맥주→OB맥주)하는 한편 M&A(1999년·진로쿠어스 인수)도 추진했다. 하지만 부진의 늪은 더욱 질퍽해졌다. 70%를 웃돌았던 시장점유율은 2000년에 45%로 떨어지더니, 2006년엔 40%까지 추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이 사장이었던 것이다.

그로선 대반전의 계기가 필요했다. 취임한 지 2개월이 흐른 2007년 6월 초. 이 사장은 임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임원실을 털어봅시다. 함께 근무해보자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OB맥주 부활 프로젝트는 ‘벽 허물기’부터 시작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OB맥주의 부진을 비밀경영과 소통부족으로 분석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에 있는 칸막이를 빼보세요. 그럼 숱한 먼지와 쓰레기가 보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벽을 허물면 조직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비밀주의·부서이기주의 등 나쁜 풍토가 금세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벽털기를 제안한 이유도 여기에 있죠.”

대부분의 임원은 손사래를 쳤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무언의 반대의사를 표시하는 임원도 있었다. 최수만 정책홍보 전무의 말이다. “대학교 도서관에도 칸막이가 있지 않습니까? 상상이 안 되는 말이었죠. 벽을 턴다고 OB맥주가 부활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혁신과정에서 가장 금기시해야 하는 것은 타협이다. 리더의 결단이 관행에 부닥쳐 꺾이는 순간, 혁신은 끝난다. 이 사장은 ‘벽털기론’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사장실·임원실의 높은 벽을 허물고 책상을 붙였다. 사원들과 똑같은 의자를 공동 구매했다. 당장 비용 절감 효과가 나타났다.

9명이던 비서를 3명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 이 사장은 지금도 개인비서가 따로 없다. 전 일본 과업진흥회 회장 요시카와 히로카즈는 “유형의 벽이 무너지면 무형의 벽도 파괴된다”고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열린 공간에서 일하다 보니 사장과 임원, 임원 간 거리가 좁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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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털기 경영법 효과

이전까지 등을 돌리기 일쑤였던 일부 임원의 입에선 ‘독설’이 아닌 ‘유머’가 흘러나왔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은 법이다. 임원실의 벽이 허물어지자 팀장급도 줄줄이 칸막이를 뺐다. 폐쇄적 공간으로 유명했던 OB맥주 31개 영업점도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 사장의 ‘벽털기 경영법’이 OB맥주의 조직분위기를 바꿔놓은 셈이다.

팀장 칸막이도 없는 열린 회사

비단 본사와 영업점뿐 아니다. 이 사장의 ‘벽털기론’은 주류유통사 등 협력업체에도 적용됐다. OB맥주는 2007년부터 ‘주류유통개선프로그램’을 도입해 주류 제조사와 유통사의 ‘상생성장’을 꾀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직원 관리, 도매상 경영, 거래처 관리 등 경영 전반에 관한 업무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 역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주류유통사는 “술 더 팔기 위한 수작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2007년 이 프로그램을 도입한 주류유통사가 1340여 곳 중 36곳에 불과했을 정도다. 이 사장의 회상을 들어보자.

“그럴 만도 했죠. 사실 주류 제조사에 대한 유통사의 감정은 좋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죠. 전통적 갑을관계 때문입니다. 꽉 닫혀 있는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죠. 이를테면 주류유통개선프로그램을 도입하면 매출이 오른다, 매출이 올라도 맥주 값을 올리지 않겠다, 주류유통사가 잘돼야 제조사도 성장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

현재 OB맥주의 주류유통개선프로그램을 도입한 업체는 64개사다. 올해는 100여 개사까지 늘어날 것으로 이 사장은 기대하고 있다. 주류 제조사와 유통사 사이에 존재하는 ‘철의 장막’을 걷어내겠다는 포부다. “주류유통사는 경영상황을 판단하고 점검할 능력이 없습니다. 실적이 추락해도, 왜 그런지 모르죠. 주류유통개선프로그램은 이들의 실적을 높여주는 데 일조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주류 제조사와 유통사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불신의 벽도 무너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호림식 벽털기 경영법의 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별도의 임원실없이 한 공간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스피드 경영에 능해졌다는 것이다. 장벽이 무너지면서 마음의 벽도 함께 허물어졌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임직원들은 똘똘 뭉쳤다. 이 사장에게 하루 50~60통에 가까운 전자우편이 전달될 정도로 쌍방향 경영도 가능해졌다.

사장~임원~직원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장벽이 무너지면서 소통이 원활해진 것이다. 이 사장 취임 전 45%에 불과했던 직원만족도가 75%를 넘어선 것도 이런 이유다. 본사뿐 아니라 생산공장도 하나로 뭉치고 있다. OB맥주 청원공장과 이천공장은 최근 생산부문 VPO(Voyager Plant Optimize)에서 각각 905점, 900점을 기록해 세계 TOP3에 등극했다.

지난해 1위 브라질 공장은 850점에 불과했다. VPO는 경영혁신 프로그램으로 공장조직의 단일화, 긴밀한 공조체제 구축이 평가요소다. 시장점유율 역시 상승곡선을 타고 있다. 카스의 시장점유율은 2006년 27%에서 2008년 33%로 껑충 뛰어올랐고, 이에 따라 OB맥주 전체 점유율도 2006년 40%에서 2008년 42%로 상승했다. 특히 ‘시노베이트’가 조사한 브랜드 선호조사에서 카스는 20대가 가장 선호하는 맥주(국내)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매각 진행돼도 “괜찮아”

이 사장은 “경영자의 의무는 직원의 새로운 가치창출을 유인해 수익으로 연결하는 것”이라며 “열린 경영이 OB맥주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좋은 실적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직 콘크리트가 마른 것은 아니다”며 “더 큰 성장을 위해 한눈팔지 않고 전진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OB맥주의 매각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OB맥주의 최대주주 AB인베브가 매각 관련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외부에선 OB맥주를 누가 인수하느냐를 둘러싸고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정작 OB맥주 임직원들은 별다른 동요가 없다. 자기 일 하느라 바쁘다. 벽까지 털어 위기를 극복했는데, 무엇이 두렵겠느냐는 자신감의 발로다. 소통이 되는데 무엇이 무섭겠느냐는 것이다. 이 사장의 벽털기 경영법이 OB맥주를 위기에도 끄떡하지 않는 조직으로 탈바꿈시켰을지 모른다.

“원칙을 잊지 않는 열린 경영의 전도사”

이호림 사장은 누구?

이호림 OB맥주 사장은 한국 피자헛 사장(2000~2002년), 월마트코리아 최고운영책임자(2003~2005년)를 거쳐 2007년 3월까지 트라이브랜드(전 쌍방울) 대표이사 및 사장(2005~2007년)을 역임한 전문 경영인이다. 미국 밴더빌트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다트머스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다.

그는 혁신을 늘 강조하지만 원칙을 잊지 않는 CEO다. 원칙이 없는 혁신이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격’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가 일상생활에서도 원칙을 지키려 애쓰는 이유다. 오전 4시30분 기상, 7시30분 출근 원칙을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을 정도다. 그만큼 그는 철두철미한 성격이다.

이 사장의 꿈은 OB맥주 간판 제품 카스를 글로벌 브랜드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카스 브랜드를 더욱 성장시켜, 애니콜·나이키·스타벅스처럼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드는 게 목표”라며 “이를 위해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겠다”고 말했다.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이코노미스트 9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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