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중환자실에 든 한국경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갑자기 도진 공황 (恐慌) 환자가 전국에 70만명에 이른다니 놀랍다.

패닉 (공황)에 오금을 떨기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블랙 먼데이' 는 저리 가라고 하루 554포인트나 주식이 폭락하자 '블러디 먼데이' (피투성이 월요일) 라면서 올 것이 왔다는 탄식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올 것이 왔다 (It's about time)' 는 우리와 발상부터 다르다.

오지 않을 재앙이 닥친데 대한 원망 (怨望) 이 아니라 그만큼 흥청거렸는데 곤두박질칠 날이 없겠느냐는 마음가짐이다.

올라간 것은 반드시 내려간다는 것에 대한 준비성이다.

천하의 빌 게이츠도 이코노미칸을 타고 해외로 난다.

두 차를 굴리던 사람은 한 대로 줄이고 크루아상을 먹던 사람은 베이글로 때운다.

정경유착으로 그토록 들어먹고 과거청산에만 스무해 가까이 허송세월하고도 올 것이 오지 않으리라는 기적을 바랐기에 패닉이 온 것이다.

우리에겐 지금 문지방을 넘어서고 있는 '올 것' 의 검은 그림자가 몇개 어른거리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겁나는 것이 붕괴 위험이다.

북한 정권의 붕괴가 아니라 남한의 재정 (財政) 붕괴다.

어느쪽 소프트 랜딩 (연착륙) 부터 도와야 할지 세계가 다 어지럽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를 구하러 달려 올 것은 국제연합군 (UNF) 이 아닌 국제통화기금 (IMF) 이다.

낯선 땅에서 야채가게를 하는 동포들까지 조국에 달러를 보내자고 팔을 걷고 나선 모양이 전쟁을 방불케 한다.

47년전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의 구조요청에 미국이 유엔군을 이끌고 온거나 진배없는 국난이다.

이번에도 미국이 앞장서야 될 일이다.

한국에 가장 많이 물린 일본이 휘청하면 월가 (街)에 묻은 일본돈이 빠져나가고 그 돈나무에서 자라고 있는 엄청난 연금과 신탁기금이 녹아 버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도미노를 막기 위해 때아닌 '봉쇄 (封鎖) 정책' 이 불거져 나오는 이유가 거기 있다.

사담 후세인을 쳐눕히기보다 원화방어가 다급하기에 펜타곤 아닌 재무부에 불이 난 것이다.

하지만 국제구호금이 들어오면 옛 군사고문단처럼 경제 '작전권' 을 내줘야 한다.

세계은행 우등 졸업국이 몇년만에 위탁경영을 받는 수모다.

그래도 구제요청은 잘 한 일이다.

새로 들어설 정부에 쪽박을 차게 하느니 죽을 쑤고 나가는 쪽이 구걸에 나서는 것이 마지막 서비스인 것이다.

국가위신은 이미 바닥을 쳤다.

물론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이 세계은행 돈을 기웃거렸다면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YS는 박정희가 아니다.

기적을 일군 박정희의 집념이 있다 해도 세상은 이미 변했다.

정부는 큰 나라 중앙은행 문을 두드려 불을 끄려 했지만 큰 나라는커녕 1백80개 IMF 회원국 외환보유고를 몽땅 합쳐도 외환시장의 하루 거래량에도 못 미친다.

프랑스 중앙은행 금고에 든 것보다 헤지펀드의 대부 조지 소로스가 주무르는 돈이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디지털 날개를 단 돈이 내려앉을 서식처를 주지 못하는 금융개혁은 헛 일이다.

변화하는 방법을 줄 때다.

구제 (bailout) 는 낙하산을 펼쳐 망가진 기체는 버리고 생명을 건지는 비상탈출이다.

낡은 보따리를 챙기려다간 생명마저 잃는다.

앙시앵 레짐 (구질서) 을 버리지 않고는 빠져나간 돈이 돌아오지 않는다.

IMF는 ICU (중환자실) 를 의미한다.

외래 (外來) 를 불러 대수술을 받는 아픔이다.

30대 그룹이 서너개만 남을 섬뜩한 수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멕시코와 다르다고 우겼지만 구제성공사례가 된 '멕시코를 닮자' 고 뛰어야 할 판이다.

미국의 따돌림으로 국제고아가 된 대만은 위기 속에 허둥거리지 말자 (處變不驚) 며 개미처럼 달러를 벌어 모아 '아시아 독감' 에도 끄떡없지 않은가.

경제주체들의 조용한 혁명으로 한강의 '기적' 이 기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전화위복 (轉禍爲福) 의 계기로 삼자.

최규장 <재미 칼럼니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