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노 전 대통령 착잡한 심경” 장군차 심으며 달랜다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관광객들이 노 전 대통령의 생가 복원 공사로 사저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잠시 모습을 드러낸 뒤 사저에서 칩거 중이다. 김해=송봉근 기자

3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엔 봄 내음이 가득했다. 개나리·진달래·산수유·매화·목련이 마을 곳곳에 만개했다. 인근 봉화산에선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을 입구와 광장엔 ‘당신은 성공한 대통령, 끝까지 함께하겠다’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라는 문구의 현수막 10여 개가 걸려 있었다. ‘봄은 당신에게서 옵니다’라는 현수막의 문구 옆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소 짓고 있는 사진도 실려 있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사저 주변은 찬바람이 감돌았다. 노 전 대통령은 물론 드나드는 비서진의 모습조차 보기 어려웠다. 사저 주변을 지키는 경찰들의 모습과, 가끔씩 단체 관광객이 주변을 둘러보고 떠나는 것이 전부였다. 노 전 대통령 사저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노건평씨 자택은 대문이 굳게 닫힌 채 인기척이 없었다. 노씨 집 옆 ‘노사모 자원봉사지원센터’ 역시 ‘내부 수리 중’이란 안내문을 붙인 채 문이 잠겨 있었다. 이런 가운데 노 전 대통령을 가장 자주 찾는 사람이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이다. 마을 사람들은 “어제도 강 회장이 다녀갔다”고 했다. 강 회장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목요일 노 전 대통령을 만나 점심 식사를 함께한다고 한다.

김경수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어 노 전 대통령의 근황을 물었다.

3일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을 찾은 한 관광객이 마을 입구에 내걸린 플래카드에 실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에 하이파이브 하고 있다. 김해=송봉근 기자

-노 전 대통령 심기는 어떤가.
“착잡해하신다. 언론이 너무 앞서 나가고 확인도 안 된 추측성 기사를 남발한다고 여기시는 것 같다.”

-사저 밖으로 외출을 잘 안 하는 것 같은데.
“전혀 외출을 안 하시는 건 아니다. 가끔 산책 겸 해서 나오신다. 관광객이 자주 다니는 시간대를 피해 마을 쪽으로 산책을 나가신다. 며칠 전에는 사저 주변에 장군차(將軍茶) 묘목을 심으러 나오시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장군차에 보이는 관심은 각별하다. 지난해 이맘때 비서진·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장군차 묘목을 여러 차례 심었다. 봉화산 기슭의 과수원 등에 이미 장군차 묘목 3만 그루를 심기도 했다.)

-조카사위가 박 회장에게 투자금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고 했지만 결국 노 전 대통령을 보고 준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검찰이 정말 투자금 명목으로 준 돈인지, 또 어디에 투자하고 있는지 조사하는 단계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님이 이 사건과 관련해 무슨 구체적인 언급을 할 수 있겠나. 어느 정도 결과가 나온 뒤 입장 표명이 있지 않겠나.”

-조세피난처인 버진아일랜드에 투자회사를 만든 것도 문제 아닌가.
“그런 내용 역시 현재 검찰이 수사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일일이 대통령께서 언급할 사안이 아니다.”

-언제쯤이면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낼까.
“지금 같아선 쉽지 않을 것 같다. 당분간 관광객들과의 공식 만남은 없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5일 관광객들과 마지막 만남을 끝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넉 달째 칩거 상태다.

봉하마을 관광안내센터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을 보러 오는 관광객이 많은데 석 달 넘게 공식 만남이 중단되다 보니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며 “검찰 수사가 길어져 봉하마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연일 박연차 게이트가 신문·방송을 통해 전해진 탓인지 봉하마을 주민들의 표정도 밝지 않았다.

“마을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게 안 보이는겨. 검찰 수사가 빨리 마무리되면 좋을 텐데….”(마을 이장 이병기씨)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주민 김모(65)씨는 “회관이나 수퍼에 모이면 박연차 리스트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을 자주 나누지예. 근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답답해들 하지예”라고 마을 분위기를 전했다.

김씨는 검찰과 언론에 대한 불만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고향에 내려와 마을 가꾸는 데 힘을 쏟고 있는 전직 대통령을 너무 몰아붙여서야 되겠는교.”

마을 주민들은 아직까지 대체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이 남아 있는 듯했다. 주민 강모(58)씨는 처음에는 말을 꺼리다가 답답한 듯 “이리 앉아 보이소”라며 말문을 열었다. “누가 뭐래도 노통 덕분에 이 마을이 이렇게 활기차게 변한 거 아닌교. 요새 갱제도 어려븐데 관광객들도 매일 1000명씩이나 찾아오고…. 전처럼 관광객들과 만날 날이 빨리 왔으면 얼마나 좋겠는겨.”

관광객들의 생각은 달랐다.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오승학(22)씨는 “노 전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깨끗한 이미지를 갖고 있어 좋았는데, 최근 나오는 뉴스들을 보면 솔직히 실망스럽다”며 “직접 돈을 받지 않았더라도 대통령으로서 주변을 단속하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해 군항제를 보러 왔다가 들렀다는 하상구(46·서울 방이동)씨는 “각종 의혹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속시원하게 해명하는 모습을 보여 줬으며 좋겠다”고 했다.

마을에서 300여m 떨어진 곳에는 요즘 이슈가 된 화포천이 있었다. 화포천은 노 전 대통령이 가장 아끼는 공간이라고 한다. 언젠가 관광객들에게 노 전 대통령은 “내 사저 주변만 둘러보지 말고 화포천을 꼭 가 보라”고 추천했다. 2~3개월 전만 해도 누런 갈대밭이 화포천을 뒤덮고 있었지만 현재는 온갖 종류의 들꽃이 피어 있었다. 화포천 정비사업에 쓰라고 500만 달러를 보탰다는 박연차 회장의 진술과 달리 화포천엔 사람이 손을 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대검 이인규 중앙수사부장은 박연차 리스트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를 앞둔 지난달 20일 T S 엘리엇의 장편시 ‘황무지’를 인용해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차라리 겨울이 따뜻했을 것”이라며 정치권에 삭풍을 예고한 바 있다. 검찰발 삭풍은 이제 봉하마을을 향하고 있으나 노 전 대통령의 침묵은 계속되고 있다.

김해=고성표 기자 muzes@joongang.co.kr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