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월드클래식’ 우승 눈앞에 둔 한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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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 끝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는 한국이 일본에 분패했다. 하지만 자유무역협정(FTA) 월드클래식에서는 우승, 완승이 확실해 보인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이래 최대의 무역협상인 한·유럽연합(EU) FTA 타결이 임박한 것이다. 지난주 런던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금융정상회의에 맞춰 좀 더 모양새 있게 타결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마지막 쟁점으로 남은 관세 환급 문제는 정치적 결단으로 조율할 수 있는 사안이다.

수년 전 한·일 FTA 협상이 중단되고 한국이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국을 상대로 어려운 FTA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일본은 싱가포르에 이어 멕시코·말레이시아·태국·인도네시아 등과 FTA를 하나씩 타결하면서 실리를 챙겼다. 무역 전환의 피해가 가중될 무렵 한국과 일본의 전세는 한·미 FTA 타결로 역전됐다. 쇠고기 수입 문제를 절대 풀지 못할 거라는 일본의 예상을 뒤엎고 한국은 미국과 전격적인 시장 개방 합의에 성공한 것이다.

더욱이 이를 발판으로 EU와의 세계 최대 경제협력체 구축이라는 쾌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미국과 EU의 양대 시장에서 한국은 수많은 경쟁국에 비해 FTA를 통한 경쟁 우위를 창출해 내게 된다. 미국·EU·일본·중국 간에는 시장 충격이 너무 커서 FTA 체결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임을 감안하면 FTA 우승국 지위는 좀체 바뀌지 않을 전망이다.

EU는 27개 회원국 간의 경제 및 정치 통합을 계속 심화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터키·알바니아·크로아티아 등 7개국에 대한 추가 편입도 추진 중이다. 1990년대 말부터 역내 통합과 회원국 확대에 주력하면서 EU는 FTA 협상을 사실상 중단했다. 그러나 2006년 10월 신통상정책을 발표하면서 FTA를 재개했는데 이때 점 찍은 나라가 인도·아세안·러시아·걸프협력회의(GCC)·남미공동시장(MERCOSUR) 그리고 한국이다. 다른 후보국들이 거대 시장을 가진 저개발국들인 데 비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서 높은 기술력을 가진 제조업 중심의 수출국이다. EU 입장에선 역내 시장에서의 경쟁 부담이 큰 상대다.

10년 만에 통상정책 기조를 전격적으로 수정한 EU가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한국을 FTA 협상 대상국으로 선택한 건 한·미 FTA로 미국의 위상이 아시아 시장에서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는 성격이 짙다. 협상 과정에서 EU가 줄곧 한·미 FTA 합의 내용과 동등한 수준의 시장 개방을 고집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조만간 협상이 타결되면 내년 상반기에 한·EU FTA가 발효될 수도 있다. 이 협상의 단초를 제공한 한·미 FTA보다 먼저 스타트선을 넘는 것이다. 재주는 미국이 부리고 실속은 EU가 챙기는 격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고 엄격한 표준 및 위생 기준 체계를 운용하는 EU와 FTA를 체결하게 되면 한국은 수출 확대는 물론이고 산업환경을 규정하는 기술표준, 위생 및 안전 기준 등 다양한 비관세 조치 분야에서 중요한 체제 개선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미국과 EU, 아세안과 FTA를 체결했거나 완료 중인 유일한 나라다. FTA 핵심 요충지로 진입하고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조만간 시작될 일본·중국과의 FTA 협상에서 한국의 위상과 비중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한국 정부가 동북아 경제협력체제 구축을 위한 FTA 논의에 대비해 협상 전략과 내용을 면밀히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국내 규제 개선과 효율적인 사회안전망 수립이다. 시장장벽이 걷히고 나면 국내에 잔존하는 불필요한 규제들이 한층 부각된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은 2008년 세계 경쟁력 보고서에서 한국의 규제 강도(regulatory intensity)를 설문 대상 55개국 중 53위로 제시했다.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또 산업별로 시행되는 시장개방 보완책들도 일관성 있는 체제로 통합해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미국의 프로야구 리그는 1876년에 출범했다. 일본은 1920년, 한국은 60년 뒤인 82년 리그를 출범시켰다. 이런 일천한 역사를 가진 한국 야구가 WBC에서 전년도 우승국인 일본과 한판 명승부를 벌이며 준우승했다. 한국의 FTA 역사도 10년이 안 된다. 그사이에 세계 통상체제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세계 개방체제를 선도하는 국가의 국민과 기업답게 모두가 한마음으로 포용력과 경쟁력을 키워야 할 때다.

안덕근 교수 서울대 국제대학원(통상법·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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