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무너진 경제 되살리자…위기극복은 모두의 몫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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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적으로 요청한 사실은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고대하던 국민들에게는 그야말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외국에 나가면 앞으로 당분간 한국인임을 부끄러워하게 됐다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많다.

문민정부의 경제성적표는 결국 IMF 구제금융 단 하나로 결판나고 말았다.

대통령 이하 전각료, 그리고 정치지도자는 국민에게 사과하는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가져야 마땅하다.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처럼 부풀려 있던 부동산 거품이 무너진 것도 아닌데 왜 경제전체가 부도난 것처럼 벼랑에 몰렸는가.

세계 11위의 경제가, 그것도 전자.자동차.조선 및 철강 등 주요 핵심산업에서 일본과 경쟁하던 나라가 이렇게 무참히 주저앉은 이유가 무엇인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살던 나라가 일류는커녕 삼류에서 사류로 전락한 느낌을 주는 IMF 구제금융은 결국 누적된 정책의 실수와 방향감각을 잃은 집권층의 책임이다.

결코 주식투자자금을 빼가는 외국인 투자자나 달러를 안 꿔주는 외국 금융기관의 책임이 아니다.

우리 기업과 은행 및 종금사가 무리한 경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책임이다.

아무리 실명제가 이유라 해도 저축 대신 흥청망청 쓴 것도 결국 우리 탓이다.

가장 결정적으로 파산기업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은행과 종금사가 질질 끌려가게 방치한 것에 대해 정부는 엄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

IMF 자금을 변통한다는 것이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해 아직 대다수 국민은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점에서도 정부는 IMF와의 협의내용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고 구체적으로 국민에게 줄 부담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우선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부실 종금사 인수.합병과 은행간 합병 과정에서 상당한 사무직 종사자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재정도 긴축하고 통화도 긴축하면 금리는 오르고 주가는 위축되고 성장률도 낮아질 것이다.

그만큼 실업자도 늘겠고 일자리의 순증가규모도 줄어들 것이다.

기업이 구조조정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고 합리화를 강도높게 진행시키면 근로자의 임금인상 요구도 거의 수용할 수 없게 되고 불요불급한 투자도 줄일 수밖에 없다.

실질 가처분소득이 줄게 되면 소비가 줄고 불황은 점점 더 깊어져 당분간 스태그플레이션의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

가계로서는 그동안 여유자금으로 해외여행도 가고, 외제 가전제품도 사고, 철따라 콘도에도 몰려가고, 외식도 자주 했으나 이제는 줄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런 암울한 시나리오의 진행을 늦추거나 그 과정에서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우리 모두 당면한 위기의 본질을 깨닫고 각자가 자기 몫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죽는다' 는 말이 몇년 전 한때 유행했다가 남이 알아서 하겠지 하는 안이한 자세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잊혀지고 말았다.

개인이 변하고 변화된 개인이 모여 기업을 변화시키고 다시 새로 태어난 기업이 국가경제를 경쟁력 있게 재구축하는 작업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요원 (燎原) 의 불' 처럼 일어나야 한다.

누가 어떻게 고통스러운 변신의 길로 국민을 설득해 나가게 할 수 있는가.

역시 제대로 된 지도력이 중요하다.

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지도자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사회가 용납해서는 안된다.

금융위기는 정부가 너무 사리에 맞지 않게 이래라 저래라 개입하지 말고 시장의 순리에 맞춰 민간과 협조해 구조조정에 성공하기만 하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앞으로 금융업은 가급적 자유화해 민간 경영주체에 위임하고 정부는 진정한 의미의 건전성 감독에 치중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관료가 규제와 인.허가권에 매달리지 말고 기업에 서비스하는 행정에 전념해야 한다.

이번 금융시장의 구조조정은 다소 부작용이 있어도 가급적 신속하고 포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단 내년 상반기까지 금융위기를 잘 넘기기만 하면 우리 실물경제 기반이 크게 무너지지 않았으므로 선진국도 파급효과를 우려해 협조할 것이다.

우리의 변신의지만 확인된다면 외국인 투자자도 다시 몰려들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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