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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욱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느린 경춘선, 빠른 경춘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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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2010년 말이면 서울~춘천 간 복선 전철이 개통된다. 지난주 정부는 이후 1년 이내에 이 구간에 고속형 좌석 전동차를 도입해 소요 시간을 40분대로 줄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올여름이면 서울~춘천 간 민자 고속도로도 개통 예정이어서 고속철까지 합쳐지면 이 지역 교통 여건에는 가위 혁명적 변화가 일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말 회사 후배 결혼식에 가느라 춘천에 다녀온 일이 있다. 아무래도 술도 한잔 해야 할 듯해서 기차 편을 이용했다. 가고 오는데 각각 거의 두 시간. 하지만 오랜만에 타본 단선(單線) 경춘선 열차는 주말 열차다운 차내의 활기찬 분위기며 차창으로 느릿느릿 흘러가는 강과 산, 호수, 다른 각도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들, 열차가 서로 비켜 가느라 역사에 잠시 정차하는 시간까지, 모든 게 소중한 경험이었다.

중학 때 서울에 올라온 뒤 방학이나 집안 경조사가 있을 때면 기차를 타고 대전 집으로 내려가곤 했다. 완행으로 잘 가면 4시간, 명절 땐 8시간이 걸리던 그 거리가 이젠 KTX로 49분까지 당겨졌다. 따지고 보면 겨우 40년, 참 많이 빨라졌다 싶을 때가 많다.

서울~춘천, 서울~대전처럼 점과 점을 이동할 땐 빠른 게 편리하다. 하지만 그 구간을 여러 점이 모인 하나의 선으로 본다면 어떨까. 서울~춘천 구간만 해도 마석·대성리·청평·강촌처럼 말만 들어도 추억이 떠오르는 곳이 많다. 시간만 많다면 어디든 마음 내키는 곳에 내려 산바람 강바람에 들꽃 향기 맡으며 걷다가 다음 열차를 기다려 또 다른 마음 끌리는 곳에 내려보는 여유를 갖고 싶은 분도 적지 않을 듯싶다.

일본에 가는 분들이 많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에 JR패스라는 게 있다. 신칸센을 포함한 모든 JR열차를 일정 기간 동안 탈 수 있는 외국여행자용 할인패스다. 도시와 도시를 이으며 단기간·장거리 여행을 하기엔 딱 좋다. 방학·휴가철에 운용하는 세이슌 주하치(靑春十八)라는 열차패스는 이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이름과 달리 모든 연령층의 내외국인 모두 이용할 수 있는 5일짜리 이 패스로는 역마다 서는 완행밖에 탈 수 없지만 아무 때나 원하는 5일(연속 5일이 아니다) 동안 쓸 수 있고, 값이 워낙 싸 (5일 패스가 도쿄~오사카 신칸센 편도 요금보다 꽤 싸다) 장기간, 여유 있는 여행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겐 인기가 많다.

빠른 경춘선도 필요하지만 느릿한 경춘선도 함께 남았으면 좋겠다. 빨리 빨리에 길들여진 우리네지만 마음 한 편엔 느림이 주는 여유, 사라져가는 여유에 대한 아쉬움, 이런 게 조금씩은 남아 있지 않을까 해서.

박태욱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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