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고 마음이 따뜻하지 않으면 사는 의미가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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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호 13면

영화 ‘기나긴 이별’의 한 장면.

비열한 거리를 홀로 걷는 고고한 기사.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가 창조한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를 가리킨다. 케케묵었다고? 좀팽이들이 설치는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런 영웅 아닐까.

남윤호 기자의 추리소설을 쏘다 -필립 말로우 <上>

말로우는 1939년 『빅 슬립』으로 데뷔했다. 모두 7편에 나오는데, 딱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기나긴 이별』(1953)이다. 하드보일드의 바이블이다. 고전 추리소설이 디즈니랜드라면, 이건 그랜드 캐니언이다. 크고 깊고 당당하고 압도적이다. 재미있다는 표현은 너무 가볍다. 한 번 읽으면 또 읽게 된다.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동안 이 책을 매년 두 번씩 읽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말로우가 만취한 테리 레녹스를 만나는 데서 시작한다. 술집 주차장에 버려진 ‘예의 바른 주정뱅이’ 레녹스를 부축해 준 이후 말로우는 그와 친구가 된다. 어느 날 레녹스의 분방한 아내 실비아가 살해되자 아내의 바람기로 고민하던 레녹스에게 혐의가 씌워진다. 이를 알면서도 말로우는 레녹스가 도피하도록 돕는다. 그 뒤 레녹스의 자살 소식을 듣고는 커피를 끓여 그가 앉았던 테이블 위에 따르고, 담배에 불을 붙여 컵 옆에 놓아 둔다. 이별이다. 그리고 레녹스의 무죄를 입증하려 고군분투한다. 우정과 긍지를 위해.

내용도 내용이지만 말로우의 매력이 범상치 않다. 탐정답지 않은 시적 정취와 염세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나는 로맨틱한 인간일세. 어두운 밤에 울음소리를 들으면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여다보러 가네. 이런 짓 하다간 돈을 못 벌지.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창문을 닫고 TV의 볼륨을 높이지.”

작가 웨이드의 살인 용의를 벗고 경찰서를 나서면서 이런 말도 한다. “내 기분은 별과 별 사이의 공간처럼 공허했다.”
현장에선 용기와 배짱, 신념과 절제력을 보여 준다. 얻어터지고 걷어차여도 물러서지 않는다. 돈 있다고 재는 부자, 힘깨나 쓴다고 나대는 깡패, 배지만 믿고 거들먹거리는 경찰에게 빳빳이 고개를 든다. 까칠하고 시니컬한 말투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자네,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군.”

“상관없소. 태도를 파는 건 아니니까.”
『호수의 여인』에 나오는 대화인데, 말로우는 늘 그런 식이다.
하지만 약자에겐 따스한 시선을 준다. 비록 그들이 범죄를 저질러도. 그는 범죄에 이르기까지의 사연을 이해하려 한다. 나쁜 짓 했으니 혼내주겠다는 팍팍한 정의감은 초월했다. 비열한 세상을 달관한 셈이다. 이런 신조가 뒤에 저 유명한 말을 만들어낸다. “강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고, 마음이 따뜻하지 않으면 사는 의미가 없소.”(『플레이백』)

세상에는 물론 자신에게도 시니컬하다. ‘총알을 다 쏴 버린 쌍권총의 카우보이’ ‘망각이라는 사막 속의 모래 한 톨’이라며 투덜거린다.
이 책엔 연구 대상이 또 있다. 말로우의 친구 레녹스다. 그는 술에 취해 떡이 돼도 기품을 잃지 않으려 한다. 남에게 신세 지기도 싫어한다. 어쩌면 말로우보다 더 따스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바로 자신을 내팽개친 그 세상을 말이다. 그래서 그와의 이별은 그리도 길어졌는지 모른다.


추리소설에 재미 붙인 지 꽤 됐다. 매니어는 아니다. 초보자들에게 그 맛을 보이려는 초보자다. 중앙일보 금융증권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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