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9>‘별들의 고향’ 돌풍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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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호 13면

이장호 감독(왼쪽)과 최인호 작가(오른쪽).

1962년 12월 하순의 어느 날 키가 유난히 작아 보이는 교복 차림의 한 고등학생이 신문사 문화부를 찾아왔다.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가작 입선 통지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담당 기자는 작품을 쓴 사람의 심부름으로 온 것이라 생각하고 ‘본인이 와야 한다’며 돌려보내려 했다. 학생은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벽구멍으로’라는 소설을 쓴 최인호입니다.”
만 17세의 서울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최인호가 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작 없는 가작에 입선한 것이다. 최인호는 그 무렵 친한 친구들을 중국 음식점에 모아 놓고 좋아하던 여학생과 소꿉장난 같은 모의 결혼식을 올릴 정도로 엉뚱하지만 조숙한 고등학생이었다. 그 조숙함은 아마도 데뷔 이후 줄곧 보여 준 소설가적 감수성의 원천 가운데 하나였을 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영문과에 진학한 최인호는 66년 11월 공군 사병으로 입대한 후 그동안 써 놓았던 단편소설 ‘견습환자’로 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했다. 뒤이어 ‘2 1/2’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해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았다. 고등학생 때 신춘문예 가작 입선이 성에 차지 않았던 그는 응모작품에 ‘당선 소감’을 첨부해 보낼 정도로 소설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70년 군에서 제대한 뒤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최인호는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독자와 평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60년대의 김승옥이 ‘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렸다면 70년대의 최인호는 ‘감성의 천재’라 불렸다. 겨우 20대 중반을 막 넘긴 최인호는 어느새 청바지와 통기타 따위로 대변되는 이른바 ‘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처럼 돼 가고 있었다. 그는 70년대 대중문화의 특성을 어느 누구보다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로서 최인호의 인생에 하나의 변곡점을 찍은 것은 72~7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이었다. 신문사로서도 모험이었지만 특히 데뷔 5년차 스물일곱의 청년 작가에게는 크나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최인호는 그 자신의 말대로 ‘모험을 즐기는’ 작가였고, 도전적인 작가였다.

당초 최인호가 생각한 제목은 ‘별들의 무덤’이었으나 ‘무덤’은 어둡다며 ‘고향’으로 바꾸자는 신문사 측 제안을 받아들여 ‘별들의 고향’으로 결정됐다. 이 소설은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하다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거친 세파에 휩쓸리면서 몇 남자에게 버림 받은 뒤 술집 호스티스로 전락, 자살로 짧은 삶을 청산한다는 주인공 ‘경아’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렸다. 연재가 시작되자마자 세간의 화제에 오른 것은 그 이야기가 70년대라는 특정한 시대의 여성상과 성 풍속도를 그리고 있다는 공감대를 독자에게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단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 비평가는 최인호가 이 사회에 퇴폐주의를 부추기고, 문학을 상업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비판했다. 어떤 평론가는 ‘별들의 고향’이 타락한 상업주의에 영합하고 통속적인 소비문학의 성향을 너무 짙게 나타내 최인호가 그 이전에 보여 준 예술적 이미지조차 흐려 놓았다고 공박했다.

이 같은 평단의 반응을 비웃듯 소설은 성공리에 막을 내렸고, 단행본으로 출간되자마자 수십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올랐다. 특히 최인호와 서울고등학교 동기동창이며 단짝인 이장호가 74년 감독 데뷔작으로 만든 영화 ‘별들의 고향’은 순식간에 관객 50만 명을 돌파하는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소설과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들은 끊임없이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렸고, ‘경아’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싶어 하는 술집 여종업원이 많아 ‘경아’가 없는 술집을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결과적으로 최인호는 ‘별들의 고향’ 때문에 한국문학 사상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누리면서 동시에 ‘상업주의 작가’라는 달갑지 않은 관을 쓰게 됐지만 그것이 그의 작가적 재능을 훼손한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이 말한 바 유능한 작가라면 어떤 매체든, 소재를 어디서 구하든 최선을 다해 써야 하고 재미있게 읽혀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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