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실업시대]5.취업대란…대졸 4명중 3명 갈곳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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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원서를 낼 때마다 아무 연락이 없을 때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도 솔직히 큰 기대는 못 하고 있습니다. " 최근 모 외국계 중소기업 원서접수 창구에서 만난 김근식 (金根植.27) 씨. 서울의 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이날까지 대그룹은 물론이고 중견.중소기업을 포함해 20여곳에 원서를 냈다.

한 섬유업체에서 서류를 통과해 면접을 기다리는 것이 지금까지의 유일한 성과. 다른 곳에서는 끝내 연락조차 없다.

취업을 위해 지난해 미국 시카고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金씨는 토익 (TOEIC) 8백80점과 좋은 학점에도 불구하고 유례없는 취업난에 발 붙일 곳이 없었다.

그는 "올해는 아무래도 포기하고 내년 상반기 경기가 나아지는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며 한숨을 지었다.

기업들의 감량경영과 유례없는 취업난이 겹치면서 '고개숙인 아버지' 들 뿐 아니라 '고개숙인 아들과 딸' 도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5대그룹의 경우 9천여명을 뽑는 올 하반기 공채에 몰려든 사람들은 무려 15만여명. 복수지원을 감안해도 최소 수만명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좌절' 을 맛보게 된다.

취업전문기관인 리크루트에 따르면 올해 구직희망자는 32만명에 이르나 일자리는 대기업.중소기업.전문직을 모두 포함해도 8만여개뿐이다.

4대1의 경쟁률이다.

4년제 대학의 내년도 입학경쟁률 1.76대1과는 비교도 안되는 수치다.

대졸자 4명중 3명이 실업의 쓴 맛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방대는 취업난이 훨씬 더 심하다.

부산 부경대학교 정순규 (鄭淳圭.25.금속공학4) 씨는 요즘도 매일 학교 도서관을 찾아 취업준비에 열심이지만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그는 "한보.삼미등 금속관련 기업들이 무너지고 포철등 다른 업체들도 신규채용이 거의 없어 학과 학생들 모두 취업 문제로 신경이 날카롭다" 고 분위기를 전한다.

지방에서 열리는 채용박람회가 부실하다는 생각에 지난 10월 서울에 올라와 채용박람회를 돌아보기도 했다는 鄭씨는 "전공을 살리는 것은 고사하고 취업 자체가 목표" 라고 말했다.

서울의 명문대를 나와 고시공부를 하다 뒤늦게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는 金모 (29) 씨는 "요즘엔 나를 키워준 부모님,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 하루빨리 안정을 원하는 여자친구 모두를 정말 볼 낯이 없다" 고 말했다.

그간 취업에 별 문제가 없던 전문대.실업고 졸업생들도 올해는 사정이 나빠졌다.

공무원.공사.금융기관등 전문대.실업고 졸업생들의 전유물이었던 직종에 대졸자들이 줄을 서면서 이들의 취업문도 바늘구멍이 됐다.

일선 상업고에서는 '은행.증권사 진출' 은 사라진지 오래라고 울상이다.

이제 대졸취업난이 문제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총체적인 취업난' 이 문제가 될 조짐이다.

기업들도 고민이다.

넘치는 지원자속에 인재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전자.정보통신.생명과학등 일부 유망 성장업종에 주력하기 위해 관련 전공 인력을 찾는 추세인 기업들은 막상 뽑을 만한 사람이 적다고 한다.

5만1천명이 원서를 낸 삼성그룹 인력관리위원회의 김기홍 (金起弘) 과장은 "2천6백명의 신규채용 인력중 70%정도를 이공계로 채울 계획인데 지원자는 인문.이공계가 절반씩" 이라고 전했다.

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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