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스 '이미지 대변신' 골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5면

'113년 전 전구 제조로 시작해 지금은 세계 셋째 규모로 성장한 가전회사, IBM의 세배에 이르는 특허권(10만개)을 토대로 세계 최초로 오디오 카세트.CD.DVD를 만들어낸 회사'.

바로 네덜란드의 필립스다. 그러나 최근 10여년간 필립스는 명성에 걸맞은 실적을 내지 못했다. 전자 제품 수요는 꾸준히 늘었지만 필립스의 매출은 15년간 30억~36억유로(1유로는 1.2달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필립스가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대만.중국의 전자회사들이 맹추격을 벌이고, 잠시 침체 기미를 보였던 일본 회사들도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시점이어서 필립스도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 것으로 풀이된다.

필립스가 먼저 손을 대는 것은 브랜드에 대한 성격 규정이다. 2001년 취임한 제라드 클라이스터리 회장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과의 인터뷰에서 "필립스의 모든 제품은 첨단 기술에 바탕을 두되 조작이 편리한 단순성에 초점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가전이 음성.영상.통신이 결합되면서 첨단화하고 있지만 조작이 어려워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얘기다.

이를 위해 필립스는 오는 9월께 '첨단성.편의성.독특함' 등 세가지의 브랜드 슬로건을 전 세계적으로 공포하고 대대적인 마케팅 활동에 돌입할 계획이다.

클라이스터리 회장은 브랜드 재정립과 관련된 비용을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액수가 투자될 것으로 보인다. 또 가전.반도체.의료장비 등 5개 부문 100여개 사업도 이번 브랜드 재정립 과정에서 상당 부분 재조정될 예정이다.

마케팅도 대폭 강화된다. 특히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10~20대보다 기존 소비자의 80%를 구성하고 있는 35~55세의 교육 수준이 높고, 소득이 평균 이상인 소비자들에 대한 마케팅을 강화할 계획이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애널리스트와 브랜드 컨설턴트의 말을 인용해 "필립스가 적절한 시점에 기민하게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필립스가 브랜드 이미지의 재정립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에 대해 FT는 "소니.파나소닉.삼성이 화려한 마케팅으로 세련된 이미지를 쌓아가고 있는 반면 필립스는 다소 고루하고 지루한 이미지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첨단 기술을 많이 가지고 있는 필립스지만 기술을 베스트셀러 제품으로 연결하는 데는 다소 미숙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유럽인들조차 필립스에 대해 첨단제품을 만드는 회사라기보다 토스터와 같은 생활가전을 제조하는 회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클라이스터리 회장은 "매출의 20%를 의료기기 부문에서 올리는 회사가 어떻게 세련된 이미지를 가질 수 있겠느냐"며 "그러나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P&G와 텔레콤 이탈리아 등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필립스의 마케팅 책임자(CMO)로 영입된 안드레아 라그네티는 "1980년대에는 소니, 요즘엔 애플이 '세련된' 브랜드로 통하는 것처럼 이 같은 기준은 언제든지 바뀐다"며 "필립스는 기술을 위한 기술이 아닌 소비자 지향적 기술로 새 형태의 제품을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필립스가 2년 연속 적자에서 지난해 6억9000만유로의 흑자로 돌아선 것도 이 같은 '장밋빛 전망'의 배경이 되고 있다.

김준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