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미술계 때아닌 '한국 바람'…한국작가 잇단 초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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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11월의 파리 미술계에 한국작가들의 '대반란' 이 시작됐다.

동양인에게 금지됐던 성역 (聖域)에 당당히 입성 (入城) 한 대가가 있는가 하면 루브르 지하공간을 단숨에 강화도 성벽으로 바꿔놓은 작가도 있다.

파리의 가을 살롱전은 온통 한국판으로 변했고 지난 여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축성 (祝聖) 한 대성당에서 최초로 한국작가가 개인전을 열었다.

회화에서 조각.사진에 이르기까지 각 장르에 걸쳐 늦가을 파리 미술계에 때아닌 한국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우리 미술작가들의 '파리 대반란' 의 현장을 둘러봤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루브르 박물관 쪽으로 이어지는 리볼리가 (街) .담벽을 돌아서자마자 조그만 돌계단이 나오고 이를 올라서면 돌과 유리로 된 육중한 건축물과 마주서게 된다.

죄 드 폼 (Jeu de Paume) 국립미술관이다.

오랫동안 인상파미술관으로 유명했던 이곳은 1986년 오르세미술관이 지어지면서 그 역할을 넘겨주고 프랑스의 현대미술 메카를 자임하면서 세계 최고의 권위와 품위를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한국의 서양화가 이우환 (李禹煥.61) 씨가 지난 12일부터 이곳의 초대로 대규모 개인전을 열고 있다 (내년 1월4일까지) .동양인으로 이곳에 초대된 작가는 李씨가 처음이다.

그런 이변 때문에 개막일에는 장 자크 아야공 파리 퐁피두센터 총관장 등 유럽의 미술계 인사들과 전세계의 화랑관계자들 4백여명이 참석해 또한번 파리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흰색 캔버스의 고요를 깨뜨리며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내려 그은 짧고 굵은 회색 점 하나가 전시장 입구에 들어선 관람객을 우선 압도한다.

이어 관람객은 깨진 투명한 유리판 위에 놓인 평범한 돌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자문하게 된다.

하나에서 많아야 다섯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점그림' 과 철판과 돌 등 가공되지 않은 중립적 소재를 재료로 한 설치조각은 李씨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작업들. "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것, 만든 것과 만들지 않은 것을 부딪혀서 거기서 나는 '울림' 을 표현하고 싶었다" 는 李씨는 60년대 일본에서 '모노 (物) 파' 운동을 주창,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에 한 획을 그은 장본인이다.

이곳 큐레이터 마르크 상셰즈는 "탈 (脫) 인간중심주의와 외부성 수용을 집요하게 추구해온 그의 작업을 21세기 미술의 한 대안 (代案) 으로 인정한 것" 이라고 초대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죄 드 폼 미술관에서 시작된 감동은 걸어서 불과 5분 거리인 루브르 박물관 지하공간에 이르러 급기야 흥분으로 변하게 된다.

하루에도 수만명의 관람객이 북적이는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 있는 카루젤 광장내 '샤를르 5세 홀' 전체가 온통 한국작가의 벽화와 회화.조각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17일부터 이종상 (李鍾祥.한국화).이대원 (李大源.서양화).문신 (文信.조각) 등 한국작가 3인의 대규모 기획전이 이곳에서 열렸다 (12월10일까지) . 샤를르 5세 홀은 지난 80년대말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미드 공사중 발견된 14세기 지하성벽을 양편에 끼고 있는 7백50평쯤 되는 큰 지하공간. 샤를르 5세 홀을 미술전시장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종상씨는 70m 길이의 부서진 성벽을 그대로 살리고 그 위에 62쪽의 한지에 그린 대형 설치벽화를 걸어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의 포격으로 무너진 강화산성을 루브르 지하에 재현했다.

이대원씨는 맞은 편 성벽을 3백 - 5백호 크기의 '농원' (農園) 시리즈 대작과 4계절 연작 등 50여점의 크고 작은 그림으로 뒤덮어 화려함의 극치를 선보였다.

또 절제된 형상으로 한국 추상조각의 지평을 연 고 (故) 문신씨의 높이 3.2m 짜리 스텐레스 스틸 작품인 '콩코르드' 등 6점이 홀 안에 설치돼있다.

한편 센 강변 에펠탑 아래 '에스파스 에펠 브랑리' 에서 지난 8일부터 16일까지 개최된 파리 가을살롱전 (살롱 도톤느)에서는 한국이 '주빈국' (主賓國) 으로 초대돼 정지환.위성만.하철경.전병화.송계일씨등 한국화가 16인이 전시회를 열었다 (30일까지) . 뿐만 아니라 파리시청 후원으로 13일부터 30일까지 한국의 젊은 사진작가인 권부문 (權富問) 씨가 파리 시내 생 루이 드 라 살페트리에르 샤펠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현대미술의 거장들이 주로 전시회를 해온 이 곳에서 한국 작가가 전시회를 갖는 것은 처음이자 이례적인 일. 또 프랑스 국립종교미술협회가 기획한 제1회 개인전에 재불 신부화가 김은중 (金恩中) 씨가 초대돼 파리 근교 에브리 대성당에서 12일부터 전시회를 갖고 있다.

이 성당은 지난 8월 파리 세계가톨릭청년대회에 참석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축성을 한 초현대식 성당으로 새로운 예술활동의 메카로 주목받고 있는 곳이다 (내년 1월15일까지) . 한국 미술이 파리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배경에 대해 현지의 가나 보부르 화랑 큐레이터 장동숙 (張東淑) 씨는 "한국 미술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이해가 그만큼 깊어졌다는 증거" 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녀는 프랑스 외무부 산하 프랑스예술활동협회 (AFAA)가 루브르 3인전과 권부문 사진전의 주최자와 후원자로 각각 참여하고 있는 것을 단적인 예로 들고 있다.

또 한국 대기업들의 유럽지역 문화예술지원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李씨의 죄 드 폼 전시회에는 삼성문화재단이 프랑스 유수의 보험회사인 AXA - UAP와 함께 메세나로 참여하고 있고 루브르 3인전에는 삼성문화재단과 대한항공이 프랑스의 대표적 대기업 가운데 하나인 톰슨 - CSF사와 함께 후원자로 참여했다.

파리 = 배명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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