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싸움에 … 박희태·정세균, 서로가 안쓰러운 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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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태 한나라당, 정세균 민주당 대표에게 4월의 출발은 잔인하다. 4·29 재·보선을 앞두고 집안 싸움에 시달리고 있다. 정 대표는 지난달 22일 귀국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공천 문제로 열흘이 넘도록 머리를 싸매고 있다. 박 대표는 갑작스럽게 터진 경주 재선거의 ‘사퇴 압박’ 논란으로 고심 중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우리 정치의 수치”라고 발언하면서 논란은 눈덩이가 되고 있다. 여야 ‘비주류의 난’이란 정치권의 표현이 이들에겐 고역이다.

한마디 정치

박근혜‘정치의 수치’발언
경주 민심에 미칠 영향은 …

박근혜(사진) 전 한나라당 대표의 말 한마디 때문에 또다시 여권이 술렁대고 있다. 박 전 대표가 1일 이상득 의원 측을 겨냥해 “우리 정치의 수치”라고 언급하면서였다. 지난해 3월 박 전 대표는 18대 총선 공천에 탈락해 친박연대나 무소속으로 출마한 자파 인사들에게 “살아서 돌아 오라”고 격려했다.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박심(朴心)’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지금 경주에선 29일 재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정종복 전 의원과 친박계 무소속 정수성 후보가 접전 중이다. 박 전 대표의 1일 발언은 정수성 후보가 “이상득 의원이 이명규 의원을 보내 후보 사퇴를 종용했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해 나온 얘기다. 박 전 대표가 직접 선거운동에 뛰어들진 않아도 언론을 통해 사실상 정수성 후보의 손을 들어준 효과를 거두는 모양새다.

1일 발언이 어느 정도 경주 민심에 영향을 미칠진 아직 두고 봐야 한다. 다만 예전부터 박 전 대표가 주요 고비 때마다 짤막한 코멘트 한두 개로 판세의 흐름을 결정지었다는 점에서 그의 화법은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2006년 5월 지방선거 직전 테러를 당해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깨어난 뒤 곧바로 “대전은요?”라고 물었고 대전시장 선거에서 역전승할 수 있었다. 2007년 대선 직전엔 이회창 후보의 대선 재출마에 대해 “정도가 아니다”라고 비판해 동요하던 보수층을 이명박 후보 지지로 묶어 세웠다.

박 전 대표의 발언은 압축적이면서 핵심을 곧장 찔러 들어가는 ‘카피라이터’ 스타일이다. 즉흥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 미리 작심해 뒀다가 던지는 말임을 짐작하게 한다. 2007년 11월 당시 이재오 의원이 친박 진영을 압박하자 “오만의 극치”라는 한마디로 반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제안에 대해선 “참 나쁜 대통령”이란 세 단어로 응수했다.


◆이미자 콘서트 관람=박 전 대표는 2일 저녁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가수 이미자씨의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관람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이씨가 박 전 대표를 초청했다고 한다. 이씨는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했던 가수로 청와대 연회에 자주 초청됐다. 박 전 대표가 대중가수 공연장에 간 것은 2005년 조용필 콘서트 이후 4년 만이다.

김정하·이가영 기자

벼랑끝 정치

정동영 공천 압박 배수의 진
정세균 대표와 만남도 피해

“벼랑 끝 전술.”

북한 미사일 이야기가 아니다. 전주 덕진에다 배수의 진을 치고 당 지도부에 공천 결정을 압박해 온 정동영(사진) 전 통일부 장관의 행보를 두고 민주당 내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2일 제주도를 찾아 4·3 위령탑을 참배한 정 전 장관은 “당원과 지지자들의 뜻을 충분히 존중해 주실 것으로 믿는다”며 지도부를 재차 압박했다. 정세균 대표와 함께 초청받은 3일 4·3 위령제에는 불참키로 해 정 대표와의 조우는 피했다. 정 전 장관의 핵심 측근은 “출마 만류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판”이라며 “입장 차가 분명한 상태에선 (정 전 장관이) 정세균 대표를 만나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정 전 장관 공천에 찬성해 온 이종걸·강창일·장세환 의원은 이날 정세균 대표를 찾았다. 이 의원은 “현명한 결정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을 따르는 전북지역 전·현직 지방의회 의원 66명도 성명을 내고 “지도부가 정 전 장관의 덕진 출마를 저지하는 데 당력을 낭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박희태(左)·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1일 저녁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0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남북한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동안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공천 결정이 지연되면서 정 전 장관 측의 벼랑 끝 전술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보는 분위기다. 중립을 지켜왔던 전북·충북지역 의원들과 구 민주계 의원들의 입장도 균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충북지역의 한 재선 의원은 “몇 차례 모임을 거쳐 입장을 모으고 있다”며 “정 전 장관의 행보에 대해선 비판적 시각이지만 공천 여부에 대해선 입장이 분분하다”고 말했다. 정 전 장관 복귀에 부정적이던 최고위원회 내부에서도 사태 수습 방안에 대한 생각은 갈리고 있다. 박주선 최고위원 등이 ‘공천 불가피론’을 꺼내면서다.

결국 조용하던 중진들이 중재에 나섰다. 박상천·김영진·문희상·천정배·이석현 등 4선 이상 5명은 이날 조찬 회동에서 모은 의견을 양측에 전달했다. 김 의원은 “양측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대화에 나서달라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중진의 움직임에 정 전 장관도 이날 오후 전주로 내려간 지 엿새 만에 상경했다. 정 전 장관은 3일 중진들과 조찬회동을 하고 다시 지방에 내려갈 계획이라고 측근이 전했다.

공천의 최종 책임자인 정세균 대표는 이날도 말을 아꼈다. 강기정 대표 비서실장은 “공천을 해도 분란, 안 해도 분란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고 정 대표의 심중을 전했다.

임장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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