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수학 교재는 과자와 레모네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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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가장 중요한 것은 선생님의 열정입니다. 선생님이 먼저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워야 교육과정을 혁신할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 테마섹 초등학교 수학교사인 리콕홍이 학생들이 비율 개념을 깨치도록 하는 데 사용했던 레몬주스 컵을 들어보이고 있다. 오른쪽은 그가 주축이 돼 자체 제작한 가정학습교재 ‘SPACE’.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우수 교사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테마섹 초등학교 교사 리콕홍(51)이 꼽은 비결은 열정(passion)과 혁신(innovation)이다. 싱가포르 대통령 표창 교사는 각 학교 교장과 동료 교사, 학생, 학부모 등의 추천을 받아 선발된다. 초·중·고교에서 각각 1명뿐이다. 지난해는 특히 경쟁이 치열했다. 이 상이 처음 도입된 1998년 이래 가장 많은 7806건의 추천이 쏟아졌다.

리콕홍은 수학 담당이다. 하지만 ‘수학만’ 가르치지 않는다. 2006년 역시 대통령 표창을 받은 같은 학교 과학교사 도리스 탄과 손잡고 과학·수학 통합수업을 한다. 지난달 18일 이 학교에서 만난 리콕홍 교사는 “수학과 과학은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분야”라며 “함께 가르치는 편이 교육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수업 방식도 남다르다. 주입식 교육 대신 실험과 놀이를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개념을 깨치도록 한다. 가령 속력과 평균을 가르칠 땐 팀을 짜 낙하산을 제작하도록 했다. 학생들은 어떤 형태가 가장 효율적일까를 고민하며 물리학과 수학의 중요한 개념 두 가지를 ‘몸으로’ 익힌다. 함께 아이디어를 짜내며 팀워크도 배운다.

다른 수업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분수를 가르칠 땐 과자를 똑같은 크기의 조각으로 자르도록 했고, 비율 개념은 레몬 원액을 물로 희석해 레몬주스를 만들며 깨닫도록 했다.

교재도 직접 제작한다. 싱가포르 초등학교는 과목별로 정부 인증을 받은 5개 출판사 교과서 중 하나를 골라 사용한다. 리콕홍은 그러나 ‘통합형’ 교재를 원했다. 적당한 것이 없자 직접 만들기로 했다. 2004년 동료 수학교사 4명과 프로젝트 팀을 꾸렸다. 과학·영어 교사도 1명씩 합류했다. ‘SPACE(School·Parent Acing Children’s Experience)’라 불리는 테마색 초등학교만의 가정학습교재는 그렇게 태어났다. 한 해 2권씩 지난해까지 10권이 나왔다. 그는 “매년 1만3000~1만4000 싱가포르달러(약 1170만~1260만원)의 정부 지원금을 받아 제작비를 충당했으며, 학생들에겐 공짜로 나눠준다”고 말했다.

교재 내용도 수업처럼 ‘생활 밀착 놀이형’이다. 가령 2학년용 교재의 경우 돈이 주제다. 엄마와 함께 장을 봐 식구들의 아침 식단을 짜도록 하는 과제가 등장한다. 20 싱가포르 달러(약 1만8000원)의 예산 내에서 스스로 메뉴를 짜게 해 사칙연산과 ‘경제 관념’을 동시에 가르친다. 교재 뒤에는 과제를 함께 한 부모 의견을 듣는 설문조사 페이지가 있다. “공부는 학교와 학생, 학부모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리콕홍의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전통 방식의 수업을 듣고 시험에 낙제했던 학생 중 30%가 성적이 올라 시험을 통과했다. 학부모의 반응도 뜨거웠다. 설문조사 결과 학부모의 99%가 새 교재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모든 학부모가 “교재를 더 많이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테마섹 초등학교는 리콕홍, 도리스 탄과 같은 선생님의 열정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학교 역사가 30년밖에 안 되지만 역사가 세 배 이상 되는 난양·ACS 등 싱가포르의 전통 명문들을 바짝 뒤쫓고 있다. 초등학교졸업시험(PSLE) 결과만 놓고 보면 전국 톱10 급이다.

싱가포르=글·사진 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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