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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리스트가 넘치는 ‘유랑민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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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그렇다면 과연 한국사회는 어떻게 이름 지을 수 있을까. 나는 소설 ‘움직이는 성’에서 황순원 선생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빌려 ‘유랑민사회’라고 명명하고 싶다. 유랑민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피란민’과 ‘유목민’이 그것이다. 피란민이 전쟁을 피해 멀리 옮겨 간 사람들이라면, 유목민은 일정한 거처 없이 이동하며 사는 이들을 말한다. 둘 사이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게 공통점이라면, 피란민에겐 전쟁과 같은 외부의 영향이 두드러진 반면 유목민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는 자발적 선택을 중시한다.

유랑민사회를 내가 주목하는 이유는 최근 논란이 되는 두 개의 리스트에 있다. 박연차 리스트와 장자연 리스트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박연차 리스트가 권력형 부패의 그늘을 보여준다면, 장자연 리스트는 연예산업의 추악한 비리를 폭로한다. ‘깨끗한 정치’를 표방한 노무현 정부의 어두운 이면을 생생히 드러내는 게 박연차 리스트라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무참히 유린된 여성 인권의 실상을 그대로 증거하는 게 장자연 리스트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공통점도 존재한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연줄망에 의해 강고하게 짜여 있는가를 웅변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선 절차나 규칙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을 움직이고 결정하는 사람만 찾으면 된다. 누구를 알고 있고 그의 연줄 관계까지 훤히 꿰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기업인이든 연예인이든 ‘스폰서’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따라서 스폰서 관리는 성공 또는 출세의 지름길인 셈이다.

다른 사회라고 해서 연줄망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그렇지 어느 나라건 연줄망은 적잖이 중요하다. 일본 정부-기업의 관계나 미국 할리우드의 문화산업을 보라. 어떤 의사 결정이든 개인의 주관적 의지가 관여하는 한, 연줄망의 작동을 완전히 배제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정밀한 제도적 장치와 성숙한 시민의식만이 이를 적절히 제어할 수 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연줄망적 특성이 우리 사회의 유랑민적 성격에 의해 유감없이 강화돼 왔다는 점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잠시 머물러 있는 공간이기에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삶을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생각하는 게 피란민의 자의식이다. 사물과 현상을 이중 잣대로 맘 편히 이해하고, 실제적 지식(know-how)보다 사람을 아는 것(know-who)이 더 중요한 게 피란민의 문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폐와 권력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휴대전화에 빼곡히 입력된 전화번호들로 상징되는 연줄망을 극대화하는 게 피란민의 전략적 선택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50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피란민처럼 살아가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일지도 모른다. 한번 훼손된 공동체 의식을 복구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선 명시적 규칙과 묵시적 규범을 준수해야 하는데도 규칙도, 규범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존재하는 게 한국사회의 자화상이다. 이런 사회에선 각종 리스트들이 넘쳐흐르고, 그 교훈을 얻기도 전에 이내 망각되기 십상이다.

유랑민의 또 다른 자기 정체성은 유목민이다.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가 강조하듯 유목민(nomad)은 세계화된 정보사회에 어울리는 새로운 인간형이다. 유목민이 갖는 창조적 성격이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먼저 피란민적 유랑민사회와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한국사회여, 대체 어디로 갈 것인가.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