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환율위기 제대로 대응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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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95년 여름 달러당 7백60원이던 환율이 최근 줄기찬 한국은행의 외환 시장개입과 재정경제원의 외화매입 단속책에도 불구하고 이제 1천원대에 올라섰다.

한국정부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해외 선물시장에서는 원화가 1천3백원을 넘게 거래되고 있다.

거기에다 주가는 2년 전에 비해 거의 절반으로 떨어져 해외의 주식투자가들은 그동안 원금의 62%를 손해보게 됐으니, 이제 무더기로 한국시장을 떠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이러한 원화위기는 우리나라의 국제공신력을 땅에 떨어뜨리고, 1천2백억달러에 달한 해외 채무의 국가경제 부담을 급증시켰으며, 국영기업.재벌그룹 및 금융기관들의 환차손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하고 있다.

이러한 환율위기가 줄지은 대기업들의 부도와 심각해진 금융권의 공황과 맞물리면서 우리나라 경제는 국내외적으로 실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오죽하면 해외 매스컴들은 태국.필리핀.인도네시아 다음으로 우리나라를 국제통화기금 (IMF) 의 긴급구호 대상국으로 지목하고 있을까. 그렇게 된 1차적인 책임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있다.

말로는 세계화와 자율경제를 외치면서도 이의 구체적인 끝맺음이나 경제운영엔 철저히 실패해버린 무능한 대통령을 뽑은 국민들의 책임이 우선 제일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최근 금융개혁 입법 (立法) 의 진통이 좋은 예다.

각계 의견을 수렴해 13개 금융개혁안이 국회에 상정됐으나 지금껏 답보상태다.

미국 같으면 대통령이 발벗고 나서서 야당 당수와 국회 지도자들을 직접 만나 로비를 하고 관련 국회의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하거나 전화를 걸어 1대1로 설득작전을 폈을 것이다.

몇몇 이해당사자들의 집단이기주의적인 반발은 있었겠으나 한국 같이 절대권력을 독차지하다시피한 대통령이 앞장서서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금융개혁을 추진한다면 안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규제 철폐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총리나 재경원장관이 규제 철폐를 외친다 해도 하루살이 목숨인 이들의 설득력이 방대한 관료조직과 이해집단들 및 그들과 연계돼 있는 많은 국회의원들을 움직일 수는 없다.

역시 대통령이 이에 앞장섰어야 했다. 지금의 환율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 국제금융계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국제결제은행 (BIS) 의 조사에 따르면 세계 외환시장의 하루 평균 거래량은 97년에 최소한 1조5천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세계 1백80여국가들의 총 외환보유고가 현재 약 1조5천억달러이니 이 모든 외환보유고를 다 써버려도 겨우 하룻동안의 외환거래량 밖에 안된다.

올봄 태국의 외환보유고는 3백60억달러로 그나라의 6개월분 총수입액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따라서 태국정부는 자신감을 갖고 외환시장에 개입해 바트화를 방어하려고 했으나 6월말까지 선물시장의 바트화 매입 등을 합치면 그나라 전체 외환보유고를 거의 다 탕진해버리고 말았다.

우리의 외환보유고는 지금 겨우 3백억달러로 우리나라 3개월 수입결제액에도 못 미치는 빈약한 액수다.

최근에 한국은행이 이처럼 변변치 않은 외환보유고를 환율억제를 위해 얼마나 탕진했는지 모르지만 매일 1조5천억달러에 달하는 외환거래량을 감안할 때 손가락으로 뚫린 강둑을 막으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더구나 정부는 외환시장에선 외환보유달러를 팔아 원화를 거둬들이고, 국내 금융시장에선 연쇄부도방지와 부실금융기관 구제용으로 지난달에만도 무려 수조원의 자금을 방출해 외환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정부는 비효율적인 외환시장 개입을 중단하고 이번의 총체적인 경제위기를 혁명적인 경제정책 전환의 호기 (好機) 로 삼아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을 하락조정한 무디스와 S&P신용조사기관들이 한결같이 정부의 제일은행과 기아그룹 구조 결정을 신용등급 하락의 주된 이유중 하나로 열거한 것만 봐도 국제 금융계는 시장기능이 아닌 정부 개입으로 부실기업들을 구제하는 것을 가장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박윤식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국제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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